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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Jun 28. 2020

내 인생 찬란했던 그 순간이여!

<카페 벨에포크> 그때의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세월이 정말 빨리 지나갑니다.

텔레비전 방송이 안 잡히면 밖에 나가 안테나를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던, 방송국이라곤 KBS와 MBC(그리고 AFKN?)가 전부였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툼한 전화번호부가 집안 필수품이었고, 전화는 시내로만 걸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자가용을 운전하시는 친구 아버지가 정말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어느새 수백 개의 채널에서 온종일 쏟아지는 방송을 손바닥만한 휴대전화로 살펴보고, 가구당 한 대 이상의 승용차 보유는 기본에 자율주행차까지 돌아다니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아내와 결혼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그새 이렇게 뱃살 나오고 머리카락 줄고 주름이 많아질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분명 제게도 파릇파릇하고 ‘그땐 정말 대단했던’ 찬란한 순간이 있었을 텐데, 세상도 몸도 변해버렸습니다.     

30대 초반 땐 나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완전 배 불룩 중년 아저씨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꼭 돌아가고픈 시절을 하루 택해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봅니다. 다소 불안하지만 정말 멋진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고객(?)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이 자꾸 나오나 봅니다.

판타지물에서 보아왔던 타임슬립과는 달리 무대장치와 음향 기술, 배우들을 활용해 그때 그 시절을 재현해주는 이야기를 담은 프랑스 영화가 나왔습니다. <카페 벨에포크>입니다.      

<카페 벨에포크>는 직업 잃고 집 잃은 만화가 빅토르가 시간여행 서비스에 나서며 시작합니다.

빅토르. 그는 유명한 만화가였습니다. 노년에 신문 삽화를 그려왔지만, 지금은 그 일마저 잃은 백수입니다.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는 그는 아들을 비롯한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은 도통 못 알아듣겠고 짜증만 납니다. 아내와 관계도 좋을 리 없습니다. 40년 넘게 함께 산 아내 마리안은 바람이 났습니다. 게다가 남편 얼굴을 보는 것조차도 싫어 빅토르를 집 밖으로 쫓아냅니다.

트렁크와 함께 내쫓긴 빅토르의 눈에 최근 아들이 선물로 준 시간여행 1일 초대권이 들어옵니다. 아들 친구인 앙투안이 설계한 서비스지요. 고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 주변 인물을 그대로 구현해 시간여행을 즐기는 기쁨을 선사해 준다고 합니다. 1974년 5월 16일을 선택하고, 그날의 기억을 서비스 스태프들에게 전달합니다.

빅토르 맞춤형 세트가 구축됐습니다. 빅토르는 그 시절의 거리와 호텔, 그리고 카페 ‘벨에포크’를 보며 추억에 잠깁니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온 붉은 머리의, 스태프들에 “죽었다”고 말했던 운명의 여인 마고를 만납니다. 빅토르를 처음 본 그날 카페 벨에포크에서 “결혼하자”고 말했고, 헤어지며 머플러를 떨어뜨리고 갔던 그녀! 이제 빅토르의 기억 속에 담긴 그녀와의 사랑이 재생됩니다.     

카페에서의 첫 만남 날 붉은 머플러를 떨어뜨리고 간 그녀. 둘의 사랑은 머플러가 이어줬습니다.

“그날 그 카페에서 만난 사람을 제가 아주 좋아했었죠.”

빅토르의 사랑은 지고지순합니다. 죽은 옛 연인을 찾는다고 생각했지만, 마고는 40여 년 전의 마리안이었습니다. 딴 남자가 생긴 게 분명하고, 나를 무시하고 쫓아내기까지 한 현실에서도 그가 생각한 찬란했던 시절은 아내를 처음 만났던 때였습니다. 둘 사이 관계는 ‘죽어버린 것’처럼 꽤 오래전 식어버렸지만, 예나 지금이나 삶은 달걀을 설탕에 찍어 먹는 마리안과의 첫 만남은 빅토르의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정말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은 잊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카페 벨에포크에서의 첫인상과 함께 나눈 대화, 주변에서의 작은 사건들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결코 놓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빅토르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에만 집착하는 꼰대 중의 꼰대입니다. 낭만 넘쳤던 그 시절에는 자신이 그린 만화책에 감동했지만, 인터넷과 유튜브 등 온라인 중심의 이 세상 사람들은 만화책을 사보지 않습니다. 신문 속 네 컷 만화나 그림으로 나타낸 만평도 마찬가지입니다. 웹툰 같은 건 적성에 맞지 않고 굳이 시도해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때는 참 좋았는데 말입니다. 마리안도 그때는 참 예쁘고 생기 넘쳤는데, 지금은 내게 성질만 내는 사람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내 정신은 정상적인데, 과거와는 달리 바뀐 이 세상이 문제점투성이입니다. 그런 그이기에 (그가 인식하기에) 찬란했던 과거에 점점 몰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빅토르가 다시 만난 마리안, 실은 마리안 역할을 재연하는 여배우에게 빠져드는 건 당연합니다. 그의 상상 속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시절의 아내인 동시에, 젊고 청초한 매력을 지닌 낯선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늙어버린 빅토르는 카페 벨에포크가 진짜가 아닌 가짜 장소이고, 눈앞의 그녀 또한 진짜가 아닌 연기자임을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빠져듭니다.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1974년의 카페 벨에포크는 자신이 나이 들어버린 현실을 잊고, 젊은 뮤즈인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시공간을 초월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거기에 더 머물고 싶습니다. 결국 현실 속 재산을 팔아가며 1974년 무대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가는 빅토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커지는 것과 동시에, 찬란했던 그 시절 빅토르 자신의 열정도 회복해갑니다.     

빅토르는 만화가입니다. 시대 흐름에 밀려 힘을 잃었지만, 시간여행 속 느낀 사랑이 다시금 펜을 들게합니다.

솔직히 당신 너무 오래 살아있어. 사라져, 나가!

마리안은 남편 빅토르와는 달랐습니다.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무척 노력해왔죠. 그래서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삶은 쉽지 않습니다. 아들은 다 커서도 자신을 의지합니다. 시대만 탓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남편을 보는 것도 지칩니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정말 미칠 것만 같습니다. 뭔가 탈출구가 필요합니다. 그때 눈에 보인 게 남편을 해고한 신문사 편집장이었습니다. 남편과는 다른, 마니안처럼 여전히 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능력자입니다. 죽어버린 남편과의 관계를 접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대상으로 적당한 상대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났고, 남편을 집 밖으로 내보낸 다음 불륜 상대를 집으로 데려오기에 이릅니다.

    

그녀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기기들과 함께 살아왔고, 전보는 고사하고 스마트폰 이전의 전화기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디지털 네이티브’, ‘포노 사피엔스’ 등이 주류인 이 시대 속에서 노력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에 노력을 더했을까요? 현실 가운데 치열히 싸우는 그녀에게 1970년대 남편과 만남을 돌아볼, 그런 사치 같은 시간은 없었을 겁니다. 당시 절친 지젤을 잊은 지도 오래됐습니다. 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라면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며 위로해 주는 게 정상일 텐데, 위로는커녕 오히려 아내의 일을 못마땅해하고 자꾸 투정만 부리고 있으니 환장한 노릇일 테죠. 불륜이 아니었으면 분명 그녀는 정신병이 생겼을 겁니다.     


그런데 웃긴 게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그놈이 그놈인 법입니다. 남편 몰래 만났을 때는 그렇게 매력적이고 좋더니만, 남편을 내쫓고 집으로 들여와 오랫동안 보고 있자니 영 성에 차지 않습니다. 남편하고는 그래도 한 20여 년쯤은 참 좋았는데, 이 남자하고는 며칠이 지난 것뿐인데 벌써 질립니다. 특히 코 고는 소리는 정말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남편만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때마침 나머지 짐을 갖고 나가겠다며 남편이 들이닥칩니다.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는 빅토르로부터 1974년 카페 벨에포크 무대에서 만난 붉은 머리 여인 그림을 받아든 마리안. 자신이지만 자신이지 않은 사진 속 여인, 추억과 질투가 느껴집니다. 그 시절의 나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남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 나는 뭘 하자고 이렇게 바쁘게 살아왔던 거지?’ 돌아봤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린 이렇게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대상을 쫓는지, 늦게서야 깨닫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싫은 건 나 자신이에요.”

현실을 멀리했던 빅토르와 과거를 기억 못 했던 마리안이 1974년 5월 16일 카페 벨에포크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날 “나랑 결혼하자”고 했던 걸 떠올린 마리안느. 하지만, 빅토르의 대답은 “No”입니다. 그들의 찬란했던 ‘벨에포크’가 지난 후 찾아온 뒤틀어진 현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25년 뒤엔 내가 보기 싫을 것”이란 그의 말이 참 씁쓸함을 줍니다. 늙고 꼰대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나니, 그저 마리안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서 거절한다는 말을 했겠지요.

자기 내면의 불안은 남편 아닌 다른 남자로 채울 수 없습니다. 싫은 나를 인정하면 사람이 제대로 보입니다.

이에 대한 마리안의 “내가 싫은 건 나 자신”이란 말이 인상적입니다.

맞습니다. 점점 늙고 초라하게 변해가는 내 모습, 이뤄놓은 게 없어 답답한 마음, 경쟁에서 뒤처질 것만 같은 초조함... 이 같은 내면의 불안이 분노로 바뀌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향했습니다. 나 자신이 싫었지만 진실하지 못했고, 대체 인물을 만듦으로써 그보다는 더 나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니 나를 사랑해줬던 상대가 제대로 보입니다. 그녀의 말처럼 이제 막 알았는데, 이미 빅토르가 막 그리워집니다. 여전히 설레는 것을 보니 둘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삶의 가장 좋고 찬란했던 순간은 사랑과 연관되어 있나 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인데... 저 역시 살면서 싫어진 저 자신을 감추기 위해 부모님이나 아내, 주변의 가까운 지인들에게 얼마나 짜증 내며 분노를 퍼부었을까요? 얼마나 많이 이불킥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삶의 벨에포크는 과연 언제였을까요, 아니면 언제가 될까요? 빅토르처럼 쫓겨나기 전에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제게도 이 같은 시간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음, 그냥 프랑스는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다른 회사 분들과 미팅이 있어 강남을 향하다가 청담동 근처의 ‘벨에포크’ 간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뭔 말인지도 몰랐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영화를 본 다음날엔 마치 간판이 제게 뛰어든 듯 크게 보이더라고요!^^ 아름다운 순간, 찬란했던 과거의 어느 때, 좋은 시절 등 벨에포크의 뜻을 고려하면 웨딩드레스샵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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