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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은 삶

내 실수로 생긴 흉터까지 다 내 별자리인데

by 임혜영

심장 부정맥이 발생하면 병원에 바로 가서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 이때 주사제를 투여하기 위해 링거를 맞는다. 그런데 빈맥이 나타나면 주사를 놓을 혈관이 싹 숨어버린다. 이때 혈관을 흡혈 귀신처럼 잘 찾아내는 능력이 있는 의료진을 만나야 빠르게 주사 라인을 잡아서 부정맥을 진정시킬 약을 투여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주사를 굉장히 잘 놓는 의사나 간호사 혹은 임상병리사가 동원되어 내 양쪽 팔과 손등을 계속 찔러본다. 그러다 어느 용자가 혈관을 찾아내면 성공이다.


보통 피부가 얇은 손등, 발등, 이마가 이러한 상황에서 라인 잡기 가장 좋은 위치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병원에 가면 항상 손등 한가운데 주사를 맞곤 했다. 부정맥이 나타나면 평소 쉽게 찾던 혈관도 이 때는 찾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자주 응급실과 병원 입원 신세를 져야 할 때는 내 손등 피부가 주삿바늘을 하도 찔러댄 덕에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작은 미취학 아동의 손등은 작고 그에 비해 주삿바늘은 뾰족했고 피부는 약했기 때문이다.


주사를 맞으면 한 손만 써야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병원에 갔으니 내가 어느 손잡이인 줄 모르던 시기였다. 그때는 왼손잡이는 무시당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오른손에는 주사를 잘 안 놓아주고 왼손을 찌르고 또 찔렀다. 물론 혈관 찾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니 오른손에도 주사를 맞을 때가 종종 있었다. 오른손이 허락된 많은 날은 오른손잡이가 되고, 오른손이 묶여있는 날은 왼손잡이가 되는 것이다. 묶인 손은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때의 습관은 여태 내 몸에 남아서 글씨를 쓰는 것만 오른손으로 하고 나머지 일은 왼손 오른손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양손잡이가 되었다.


가끔 내 왼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등 중앙에 주사 흉터가 마치 귀찮아서 휘갈겨 쓴 리을같이 자리 잡고 있다. 세월이 흘러 어릴 때보다 많이 옅어졌지만 가족들 정도는 구분하고 나 스스로는 바로 보이는 그런 흉터이다. 엄마에게 장난 삼아서 "나 잃어버리면 이 흉터 보고 찾아"라고 한다.


그 흉터 옆에 또 작은 주삿바늘 흉터가 있다. 이걸 보면 잊기 힘든 재미있는 의사 선생님 한분이 떠오른다. 털털한 여자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이 병실에 들어오면 그 사람의 존재와 기운만으로 에너지가 느껴지고 재미있던 사람이다.


우는 아기에게는 호랑이 선생님이고 나처럼 조용히 주사를 맞는 아기에게는 매번 나를 웃겨주려고 온갖 농담을 던지던 사람이다. 능력도 있어서 찾기 힘든 혈관을 잘 찾아내서 주사를 놓는 사람이었다. 소아환자는 성인보다 혈관 찾기가 어렵고 거기에 더해서 애가 울고 불고 난동을 피우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얌전히 손등을 내주는 애였지만 내 혈관은 내 심장 때문에 그리 얌전하지 않았다. 하루는 또 급하게 라인을 잡아야 하는데 그날 이 선생님이 내 라인을 잡게 되었다. 역시 너무나도 빨리 라인을 잡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 그 선생님이 못 가진 것은 바로 주삿바늘을 튼튼하게 고정시키는 능력이었다.

스스로 "나는 놓는 건 잘해도 포장을 못해 그래서 주삿바늘이 빠질 수도 있어 허허허" 하던 분이었다. 그말이 재미있어 같이 웃곤 했는데 그분이 놓아준 주사 바늘이 정말 내 손등에서 빠졌다. 왜냐? 포장을 못해서


살짝 빠진 상태로 있다가 아파서 테이프를 뜯어보니 빠져 움직여진 탓에 손등에 구멍이 생겨있었다. 그걸 보며 굉장히 미안해했지만 나는 덤덤했다. 맨날 찌른 곳을 또 찔러 난 구멍이나 이 구멍이나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다 나아서 이 구멍이 흉터로 남는다면 그때 나쁜 기억은 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는 샘이 만들어준 흉터다 정도로 기억해줘~"

그래서일까? 이 흉터만 다른 군집을 이룬 흉터와 달리 조금 옆에 떨어져서 바로 알아볼 수 있게 흉이 졌다. 남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보인다. 그리고 그 선생님을 기억했다. 나는 이제 부정맥은 다 치료되었고 더 이상 아기가 아니지만 이 흉터까지 나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어른이 되었다.


정신없이 밥을 먹다가 목에 건 삐삐를 갈비탕에 빠뜨려서 고장 내고 와서 내 앞에 와서 장난을 쳤다. "야~이거 가져라 내가 갈비탕에 빠뜨린 삐삐다" 하고 던져주고 가던 개구졌던 의사였다. 만약 그 때 그 의사가 "흉터 생기게 해서 미안해 어떻게 해"하며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었다면 나도 괜히 시무룩해졌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해달라는 둥 내가 포장을 못한다며 시답잖은 농담으로 이 흉터를 그리고 다른 흉터를 내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보고 넘길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큰 흉터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흉터가 생기는 것에 민감하다. 그 흉터가 몸에 난 것이든 그 사람 인생에 생기는 작은 스크레치든 흠이 없는 완벽한 상태를 추구한다. 이런 분위기를 보면서 종종 생각한다. 한 사람의 모습은 무조건 흠 없이 완벽해야만 하는가? 남들 기준에 결함이 없어 보여야 하는가?


BTS노래 love myself에 "내 실수로 생긴 흉터까지 다 내 별 자린데"라는 가사가 있다. 몸에 난 흉터도 마음에 생긴 상처로 생긴 흉터도 다 같은 흉터일 것이다. 지금은 너무 힘들지라도 지나고 나면 아물어있는 것


가끔 내 힘든 마음을 sns에 토로를 하거나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것이 나중에 내 발목을 잡진 않을까 걱정되는 순간이 있다. 흠 잡힐 일이 없다는 것은 내 과거도 현재도 흠이 없이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한치의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이 든다. 내가 정말 스스로에게 흠이 될 행동을 한 것이 있나? 내가 범법을 저질렀는가? 아니다. 내가 남의 물건을 도둑질 했는가? 그런 적이 없다. 내가 누굴 괴롭혔나? 나는 반대로 괴롭힘을 잘 당한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힘듦, 슬픔, 괴로움은 결코 흠이 잡힐 심각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냥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라면 모두 겪어보았을 법한 마음고생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들 한 번씩 상처 받아서 몸에 하나씩 가지고 있는 흉터들이다. 이 흉터를 없는 척 가릴 필요 있을까? 그리고 나중에 이 흉터를 보고 너는 왜 이런 흉터가 있냐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볼 필요가 있을까? 그게 무서워 아무것도 못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아서 안전할 것이다. 상처도 안 받고 새로운 흉터도 안 생기겠지만 그것이 살아가는 것인지 유리관 속에서 세상을 그저 관망만 하고 있는 것인지는 내 작은 세계를 깨고 나와서 조금 더 부딪혀 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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