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말해도 되는가’라는 윤리적 판단과, ‘말해야 하는가’라는 존재적 갈증 사이에서 끊임없이 망설이는 일이다. 나는 종종 이 두 질문 사이에서 멈춘다. 말할 수 있지만,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것들도 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아꼈다. 말하는 순간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릴까 두려웠고, 말하는 순간 관계가 단절될까 주저했다. 침묵은 방어이자 은신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침묵이 곧 나를 지우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지 않는 자는 기억되지 않는다. 존재는 언어와 연결될 때 사회적으로 승인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나는 타인을 해치지 않으면서 나의 고통을 기록할 수 있을까? 내가 겪은 것을 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나는 이야기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독자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타자가 된다. 이 불균형은 글쓰기의 본질이다. 나를 보호하면서도 드러내야 한다는 모순은 글쓰기의 윤리 안에서만 겨우 조율된다.
나는 종종 어떤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쓴다. 그 문장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봐, 혹은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래서 글은 진실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 진실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드는 구조물 같다. 나는 내 삶을 숨기지 않되, 그것을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려 한다. 글쓰기란 결국, 기억을 해체하고 다시 짜는 일이다.
‘이 정도까지는 말해도 되겠지’라는 계산과 ‘이것만은 꼭 말해야 한다’는 절박함 사이에서 글이 태어난다. 그 글이 누군가에게는 과장처럼 보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절제되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불균형 속에서만 겨우 유지되는 진실이 있다.
나는 이제 말한다. 침묵이 나를 지우는 방식이라면, 글쓰기는 내가 사라지지 않도록 나를 붙드는 방식이다.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나의 존재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글은 나의 감정을 소비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감정 너머에 존재하는 나를 붙들기 위한 구조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한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닿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닿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