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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없는 나는, 사라진 사람일까

by 경계 Liminal

구직 플랫폼에서 ‘희망직무’를 고르지 못한 날이 있다. 수많은 선택지가 펼쳐졌지만, 어느 하나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 리스트를 스크롤하다가 브라우저를 닫았다. 그 순간, 나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말문을 잃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멈췄고, 동시에 사라졌다.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라는 질문은 늘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나는 나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만, 그 질문은 늘 ‘직업’으로 수렴됐다. 나는 단지 일이 없는 사람일 뿐인데, 어느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직업은 하나의 역할이지만, 이 사회에서는 그것이 곧 사람을 정의하는 방식이다.

일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력서에 적을 수 없고, 수익으로 환산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글을 썼고, 기록을 모았으며, 사라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은 ‘무직’이라는 두 글자 아래 압축되었다. 그 말은 기능하지 않는 사람, 혹은 실패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나의 행위가 구조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사회는 일을 통해 나를 설명하길 원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설명 바깥에서 나를 감각한다. 생존은 기능으로 증명되지만, 존재는 여전히 의미의 영역에 남아 있다.

존재는 무의미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살아남는 것이 존재의 의미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글을 쓴다. 어떤 제도에도 속하지 않더라도,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다고 증명하기 위해. 쓰는 동안만큼은,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붙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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