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으로 남으려다 망가진 순간
굵은 목울대가 아래위로 요동치며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Scene #1
화용도의 좁고 축축한 진흙길 위로 질퍽한 마찰음이 낮게 이어졌다. 창날이 사라진 나무 막대들이 지팡이를 대신하며 진흙탕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쩌억. 쩌억. 장화가 진흙 표면에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소리를 냈다. 조조의 뒤에 늘어선 병사들의 어깨 위에는 갑옷 대신 피 묻은 헝겊 조각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동상으로 검게 변한 발등 위로 차가운 흙탕물이 튀었다. 그때마다 발가락이 안쪽으로 구부러졌다.
병사의 손에 들린 수통이 거꾸로 뒤집어지며 흔들렸다.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앞선 병사의 허리띠를 힘겹게 붙잡고 선 병사의 다리는 진흙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 행렬의 맨 앞자리에 선 조조의 짧은 수염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했다. 말고삐를 잡은 그의 손가락이 작게 떨렸다. 불에 탄 비단 전포의 구멍 사이로 뿌연 안개가 스며들었다.
모퉁이를 돌자, 짙은 안갯속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우가 말고삐를 당겨 잡자, 말이 앞다리를 들고 일어섰다가 다시 땅을 밟았다. 말 울음소리가 안개를 걷어내며 사방을 울렸다. 조조의 폐부 깊은 곳에 모여있던 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조조의 갈라진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대가 나를 떠나며 내가 아끼는 장수들을 베었을 때도 나는 그대를 탓하지 않았네. 기억하는가.”
조조의 시선이 관우의 두 눈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녹색 전포의 낡은 소매 밑단을 거쳐 적토마의 붉은 깃털에 가 멈췄다. 조조의 눈에 희망이 비췄다. 안개 낀 숲의 습한 정적 사이로 조조의 희망 섞인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Scene #2
짙은 안갯속에서 적토마 위에 올라앉은 관우의 거대한 형체는 미동도 없었다. 조조에게 머물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때 조조가 관우에게 보인 정성은 가볍지 않았다. 언제든 떠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항복을 수용하더니 크고 작은 연회, 금은보화, 비단 전포, 그리고 지금 타고 있는 적토마까지 조조는 관우를 항장이 아닌 객장으로 대우했다. 게다가 지금 조조는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그의 여섯 장수를 살해한 일을 묻고 있었다. 관우의 눈동자가 연신 흔들렸다.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손의 뼈마디가 툭 불거져 나왔다.
관우 뒤에 도열한 오백 도부수(刀斧手)의 시선은 오로지 조조를 향해 박혀 있었다. 그들이 쥔 무기의 날 선 끝이 안개 사이로 희번덕거렸고, 금방이라도 진흙 바닥을 박차고 나갈 듯 장딴지 근육이 수축돼 있었다. 푸르륵. 적토마가 거친 콧김을 내뿜자, 말의 코앞에 머물던 하얀 안개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순간, 관우는 자신이 한 약속이 떠올랐다. 만약 조조를 사로잡지 못한다면, 목숨을 내놓겠다는 호언장담이 적힌 군령장이 본진의 탁자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굵은 목울대가 아래위로 요동치며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눈을 뜨자, 조조의 뒤편으로 패잔병들의 잔상이 드러났다. 다리가 잘린 병사를 실은 부서진 방패가 머리에 헝겊을 감은 병사의 손에 끌려 진흙탕 위를 미끄러졌다. 동상으로 검붉게 부어오른 맨발이 진흙 탕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공중에 비스듬히 치켜 들린 청룡언월도의 칼날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고삐가 당겨지며, 적토마가 옆으로 비켜섰다. 관우의 시선은 멀어져 가는 조조의 뒷모습을 쫒지 않았다.
관우는 조조에게 머물러 있었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떠났다. 관우에게 ‘의리’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위 사건에서는 그 의리가 조조를 향했다. 유비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조조를 놓아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조직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능력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는다. 하지만 조직에서 의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되기도 하고, 원칙을 시험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이 사건에서 의리는 조조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됐고, 관우에게는 원칙을 시험하는 족쇄였다. 결국 조조는 해결했고, 관우는 깼다.
관우에게 군령장은 '조직의 기준'이었지만, 조조와의 인연은 '자신을 정의하는 기준'이었다. 그는 결국 조직의 미래 대신 자신의 명예를 선택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과 조직의 운명을 동시에 걸어야 하는 일이었고, ‘의리’로만 설명하기에는 그 비용이 너무 크다.
어쩌면 당시 관우는 스스로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깊이 갇혀 있었고, 그 때문에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그것을 지켜야 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조직에서도 이런 프레임의 감옥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주말마다 출근하는 대리,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부당한 업무를 거절하지 못하는 과장, ‘의리 있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잘못된 결정에 침묵하는 임원이 그렇다.
나 역시 ‘좋은 선배’라는 이미지에 갇혔던 적이 있다. 리더로서 일이 많으면 팀원들에게 야근도 시키고 주말에도 나오라고 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질 못했다. 혼자서 해결하려다 보니 능률이 오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눈치껏 도와주지 않는 팀원들을 탓하기 시작했다. 더 좋지 않은 결과만 남았다.
관우가 화용도에서 칼을 거둔 것은, 지난날 조조와의 인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남기기 위한 선택이었는지는, 공중에 비스듬히 치켜 들린 청룡언월도의 칼날만이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