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 바사삭
자기 이름 내걸고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언제일까.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을 테다. 내가 목격한 사례만 해도 다양하다. 가령 이런 거.
①소위 '빨아주는 기사'를 써야 할 때
그래도 이건 양반이다. 회사 수익과 연결된다. 광고를 위한 밑밥 같은 거 아니겠나.
②공들인 기사가 잘렸을 때
킬 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분개할 일이지만 '톤 다운'을 가장해 비판적인 부분이 뭉텅뭉텅 잘려나가면 그것도 상당히 분노할 일이 된다.
③기사 주도권을 빼앗길 때
첨삭이나 데스킹도 그렇지만 내 경우는 이런 거. 취재가 어려운 취재원을 섭외해 어떻게든 기사를 완성했는데 그 과정에 취재원이 보도 시점을 조금만 늦춰달라고 했다. 취재원은 당시 사회적 약자에 속했고 나는 가능하면 부탁을 들어주려 했지만 데스크에서 거절한 뒤 곧바로 기사화해 버렸다. 나는 항의했지만 "언론사에서 그런 게 어딨어"라는 원론적인 대답만 데스크는 반복할 뿐이었다. 기분 진짜... 같았다.
④기사 요건이 안 되는 걸 기사화해야 할 때
①번과도 닿아있는데 조금은 결이 다른 이야기다. 어디서 이상한 이야길(주장) 듣고 와서 기사화를 지시한다. "만들어"가 아니라 "알아보라"거나 "되겠냐?"라는 식. 안된다고 보고해도 결국 기사화하게 되는 일이 가끔 있다. '왜 이러는 거지?'라는 의문에 답을 못 찾으면서 '그냥' 해야 하는 일은 정말 거지 같다. 그것도 자기 이름 달고 나가는 글을 말이다. 직접 쓰든가. 조금 비겁한 거 아닌가 싶고.
개별 사례들은 아마 모든 언론사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경우에 항의할 수 있거나 충분한 논의를 또는 논의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곳은 그나마 환경이 나은 곳일 게다. 나는 언론계에서 한발 발을 빼면서 다시는 내 이름을 달고 글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글쓰기'도 기술은 기술인지라 유관 업무만 자꾸 하게 된다. 아마 글에 애정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러하겠지만 저런 사례들을 겪으면 사기가 급속도로 저하된다. 이런 이야길 꺼내는 이유는 내가 최근 비슷한 경험을 연속으로 하고 있는 탓인데 정말 현타가 수시로 온다는 걸 어딘가에 고백하고 싶었다. 주장을 하면 근거는 필수고, 형식에 맞는 글쓰기를 요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모두 다 그렇다"거나 "원래 그래"라는 말을 수긍하는 순간 과거의 나를 부정하게 될 것만 같아 이 선을 넘기가 힘들다. 특히 "그거 뭐 대단한 일이라고"라며 말이 안 되는 글에 자기 바이라인을 다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는 이들도 많은데, 자기가 공들여 조립한 건담 프라모델의 하체를 살색으로 칠한다든가 팔과 다리를 바꿔 끼워 진열장에 진열해둔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쉬울 거다. 만든 사람 이름엔 자기 이름을 쓴 채로.
아, 레알 현타 온다. 그래서 필터링도 없이 나오는 대로 막 쓴다. 기분이 안 좋으면 끼니를 거르는 습관이 있는데 오늘 점심도 거를 것 같다. 커피나 마시러 가야겠다. 가서 플랜 B를 세워야겠다. 조금 수고롭더라도 자기 글을 쓰는 게 맞는 일일까. 부업을 뛰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겠다. 아니, 근데 고민 없이 글을 쓰는 게 좋은 거야, 글에 고민(정성)이 깃드는 게 좋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