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Puente la Reina/Gares~Estella/Lizarra
1. 정말 빠른 사람을 만났다. 리투아니아 여자다. 스틱 없이 걷는다. 내가 걷기 시작한지가 오늘로 5일짼데 이 사람은 오늘 3일째란다. 말인즉 5일간 걸은 거리를 3일동안 걸어서 따라잡은 거.
2. 짬바는 무시 못한다. 산티아고길 5번째 걷는다고. 하루에 45km를 걷는데, 자신을 그렇게 몰아붙이면 그 뒤엔 밥을 먹든 쉬든 뭘 해도 좋단다. 그렇다고 해도 하루 45km는 페이스가 좀 빠르지 않은가.
3. 며칠간 걸으면서 느낀 건데 내가 걸음이 제일 빠르다. 일행이 없기에 독보적으로 치고 나간다. 습관이라 그렇게 됐다. 근데 이 사람이 어느새 시야에 들어와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몇 번은 나를 앞질렀다. 둘 다 사진 찍으면서 돌아다니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건 뭐지?' 했다.
4. 둘 다 걸음이 빨라 한참 같이 걷다보니 사정이 저렇다고. 사진을 찍어달래서 폰을 받아 찍어줬더니 이렇게 뷰티풀한 사진은 처음이란다. 사진을 부탁하면 대부분 호러블하게 찍어준다고. 내 짬바는 거기 있다고 말하려다가 "It was my job."으로 대신했다. 그랬더니 자신도 저널리스트라네? 이런 우연이.
5. 사진 찍자 해서 같이 찍었는데 내 사진 너무 산악회 청년회장처럼 나온 것.
6. 오늘 숙소는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곳. 소규모지만 평이 좋아 왔다. 이곳도 내가 1빠. 문 열기 전 도착해 밖에서 기다렸다. 레몬티 내주며 안내도 해주고, 정말 친절하다. 나는 주로 규모가 작거나(침상 수 기준), 저렴한 곳(공립 알베르게) 위주로 숙소를 잡는데 이때까지 모두 만족스러웠다. 물론 저 기준을 충족하면서 평이 좋은 곳으로 간다. 평은 gronze.com이라는 사이트에서 산티아고길 정보와 함께 확인할 수 있다.
6-1. 따라서 저렴하지만 평이 나쁘면 피하고, 공립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비싼데 규모가 작은 곳(+평이 좋은)이 있으면 거기로 간다. 이게 어떤 면에서 RPG게임과 매우 흡사해서 그런 쏠쏠한 재미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 실패가 없어서 그렇기도 하고.
7. 오늘 숙소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부부가 자원봉사 차원에서 운영 중인 곳. 덕분에 영어로 소통하는 게 훨씬 수월하다. 남편을 봤을 때 문득 미드 <브레이킹 베드> 주인공이 생각났지만 그 어디에도 대마는 없는 듯하다. 친절만 가득한...
8. 부엌에 조미료도 가득하고 쓸 수 있는 유틸리티들도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차도 내려먹을 수 있고 전자레인지도 두 대나 있다. 구조나 배치도 나쁘지 않아 숙소 만족도가 꽤 높은 편.
9. 다만 이 도시 공립 알베르게 가격도 상당히 저렴한 편인데, 이곳을 선택한 건 더 저렴하게 이용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근데 호스트 할아버지가 "도네이션 금액은 상관 없다"며 "많이 내면 많이 내는대로 다음에 돈이 궁한 사람을 위해 쓰일 거"라고 해서 공립 알베 가격보다 더 내버렸다. 공립은 6유로인데 나는 도네이션 10유로 했다. 뭔가, 저런 말을 들으니 코인 넣기도 애매했고 5유로짜리 잔돈이 없어서 그만...
10. 오늘 아꼈다가 다음에 헤밍웨이 가게 같은 곳 또 가려고 했는데 이런 함정이. 심지어 브라질 커플은 둘이서 5유로 내고, 독일 여자는 1유로 냈다고 다른 이에게 들었다. 와, 너네는 진짜...
11. 살이 너무 빠지는 듯해 슈퍼마켓에 가서 식사거리를 잔뜩 샀다. 모처럼 볶음밥에 치킨덮밥, 컵라면, 스낵랩, 방울토마토, 캔콜라, 갓 짜낸 오렌지(쥬스), 슈웹스 등. 덮밥과 컵라면, 콜라와 방울토마토로 점심을 해결하고 볶음밥과 스낵랩, 쥬스 등을 저녁거리로 남겨뒀다. 며칠간 100km 넘게 걸었더니 쑥쑥 들어간다. 에너지 보충.
번외) 성당 문 닫혀있어서 못 들어가고 성당 앞 광장에서 애들 사진 찍다가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애들에게 물어보고 찍었는데 그게 문제가 됐나보다. 어디나 애들 사진은 보호자에게 물어야 하는 것 같고. 애들과 히히덕 거리며 찍고 있는데 어디선가 할머니가 나타나 "노 포토!"라며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 외 말은 스페인어라서 하나도 모르겠다. 강한 어조로 그 말을 거듭하며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번역기로 "애들 사진 다 지웠어요"를 보여준 뒤에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마트면 스페인 사진 다 지울 뻔. 식겁했다.
번외2) 슈퍼에서 사온 저녁을 먹으려다가 브라질 부부가 만든 밥을 먹게 됐다. 이 작은 알베르게 멤버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밥과 와인을 먹는데 분위기가 괜춚. 스페인 부부에겐 '쵸리소'라는 걸 얻어먹었는데 원래 생 걸로 먹는 건가. 맛이 독특했다. 돼지순대? 돼지소세지? 라고 번역되는데 더 먹으라고 잔뜩 줬다.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얘기하다가 사진도 한 장 찍고, 그렇게 자리를 파했는데 작은 알베에 이 정도 멤버가 모이기도 쉽지 않은 듯. 운과 때라는 건가. 브라질 부부도 알베르게 멤버가 이렇게 사진 찍는 건 걷기 시작한 뒤 처음이라고. 나도 처음이다. 멤버는 미국인 부부(호스트), 브라질 부부, 스페인 부부, 독일 커플, 한국인 둘, 미국인 둘, 스페인(?)인 하나.
번외3) 10번에 한 말을 취소해야겠다. 각자의 사정이 있더라. 그게 모두의 사연이 되는 곳이 여기 아닌가 싶고.
잘 시간이다.
오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