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날'

나의 산티아고, 8일째

by OIM

10.9 Estella~Los Arcos

1. 익숙해지는 건 무섭다. 아침에 잠이 늘었다. 어젯밤 10시쯤 잠들다시피 했다가 오전 6시에 일어났다. 글을 올리다 잠든데다 전처럼 5시쯤부터 눈이 떠지지 않는다. 적응했다는 방증.

2. 오늘은 거리가 짧았다. 21km정도. 4시간 30분만에 주파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알베르게 문 열기 전에 도착해 기다려야했다. 내일 여정을 위해 더 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조금 추웠고, 졸렸다. 몸이 휴식을 필요로 한다는 신호다.

3. 이 마을엔 평 좋은 숙소가 드물다. 작은 마을이라 숙소 자체도 드물다. 하여 찾아봤더니 공립 알베르게에선 배드버그에 물렸다는 이야기가 몇 나온다. 복불복으로 걸릴 수 있다는 그 불운을 나는 피해가기로 한다.

4. 공립 가격의 2배에 달하는 사설 알베로 왔다. 더 갈까, 어쩔까 하다가 그냥 쉬기로. 근방 8키로 반경 내 딱히 더 나은 선택지도 없어보인다. 짐을 풀고, 씻고, 잤다. 무려 세 시간 잔 듯. 컨디션이 조금 회복됐다. 눈 말똥.

5. 다른 알베처럼 환대한단 느낌은 없다. 친절보단 시설이랄까. 침상이나 욕실이 깔끔하다. 비록 요리나 손빨래가 안되지만 그에 준하게 정돈이 잘 돼있다. 그러니 장단의 대비가 선명한 곳. 사실 단점이랄 것까지도 없다만.

6. 어제 알베 선택 잘못 했으면 뉴스에 나오는 '코리안' 또 볼 뻔했다. 자세한 설명을 남길 순 없지만, 내용에 대한 악플 수는 보장할 수 있을 정도의 행위들을 저질렀다고 들었다. 아마 이런 일들을 일부 한국사람들은 '그 정도는...' 식으로 여기나 보다.

6-1. 한 번 친해지면 이런 일이 생기려고 할 때 "그거 하지 말자" 같은 게 잘 안 된다. 이를 테면 "오늘 저녁에 한국분들이랑 xxxx 해요!" 같은 말이 나오면 수긍하거나 혼자 빠지거나 중 택일해야 한단 말. 그런 면에서 안면 트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는 건 호재.

7. 종교인들이 이 길에 가진 애정과 의미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조금 더 엔터테이먼트적 요소를 가지고 이 길을 걸어도 되는지 의문이다. 어제 얘길 나눈 외국인들이 이 길을 대하는 태도와 매칭되며 한층 더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중.

7-1. 특히 순례자의 길을 지리산 종주 쯤으로 여기며 그곳 어느 산장에서 벌이던 일을 이곳으로 끌고 오는 데 아무 거부감이 없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8. 광장과 접한 레스토랑에서 혼자 저녁 먹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또... 왜 한국사람은 셋만 모여도 큰소리가 나냐ㅠ 광장이고 숙소고 진짜ㅠㅠ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듣는 "한국인 되게 많더라"는 말을 썩 달갑게만 들을 순 없게 되는...

9. 산티아고 르포 한 번 시켜주면 '코리안'의 'ㅋ'까지 묘사 가능할 듯. 물론 내가 써서 연재할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와서 기사 쓰고 싶진 않...

10. 차치하고, 저녁 좋았다. 어제 산 밥과 스낵랩이 있어서 해먹으려 했지만 "노 쿡"이란다. 그래서 사먹었다. 오늘은 쉬기로 한만큼 '회복의 날'로 정했다. 잘자고 잘먹고. 성당이 보이는 광장에서 해물스파게티와 수프, 콜라를 먹고 후식으로 카페 콘레체를 마셨다. 가격은 약 10유로. 근데 특이한 게, 여긴 좋게 말하면 재료의 특색이 다 살아있고 나쁘게 말하면 재료 냄새(?) 같은 게 그대로 난다.

11. 외식 같은 씀씀이를 결정하는 주된 요소는 당일 지출이다. 산티아고 카페에서 검색해보니 하루에 보통 4만 원 정도 쓰게 된다고 한다. 나도 저 금액을 기준으로 많고 적음을 따져 외식을 결정한다. 숙소를 좀 좋은(비싼) 데 가면 밥을 슈퍼에서 사와 해먹는다. 또는 걷다가 힘들어 스낵카에서 폭주(?)하면 그날은 공립 숙소를 가서 밥 해먹는 식이다. 되도록 당일 지출이 4만 원을 넘지 않게 하려는 중인데 생장부터 일간 지출을 평균 내 보니 약 33,000원이 나온다. 매번 공립 간다면 이보다 3,000-5,000원 이상 줄일 듯.

11-1. 실제로 외국애들에게 숙소 선정 기준을 물었더니 "cheapest one"이라고 답하는 애들이 꽤 됐다. 이런 나조차 산티아고 전체 평균으로 보면 조금 호사스럽나 싶고.

12. 아참, 밥 다먹고 광장에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시는데 옆자리 할머니가 합석(?)을 요청해서 잠시 대화했다. 런던에서 온 '수'라고. 가방은 버스로 이미 다음 타운에 가있고 자신은 걷는단다. 자기에게 가방은 너무 무겁다는데, 서양인들의 노화 정도를 고려하더라도 60-70살은 돼 보인다. 나는 커피를, 그는 맥주를 마셨다. 이곳에 온 이유, 어떤 일을 했는지, EPL(쏘니) 등을 주제로 담소. 눈 앞엔 성당이, 그 위 첨탑에선 7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댕, 댕, 댕. 살짝 차가운 바람이 커피잔을 감싼 손등을 스치는데 하늘은 아직도 푸른 빛을 띠었다. 순간이 호사스럽단 생각을 내 일상과 동떨어진 타국 어디에서, 이런 방식으로 하게 될 줄 몰랐는데.

12-1. 영미권 외국애들 만날 때마다 영어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는데 이거 무슨 'how are you' 같은 건가. 여기 와서 4번 이상 들은 듯.

12-2. 역시 프럼 영국인지, 미국식 발음에 어색하다. "포로 조널릐스트"라고 했더니 되물어서 "파터 저널리스트"라고 했더니 "오~ 포토 저널리스트!"란다.


번외) 저녁, 조식 다 불포함에 손빨래 안되고 쿡도 안되는 곳이라 그런지 와이파이 잘 터짐. 하나가 나쁘면 하나는 좋은 이 균형감.

번외2) 오늘 걷다가 생각난 건데, 이 길 다 걷고 포르투갈과 스페인(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도는 게 훨씬 즐거우면 어떡하지. '좀 더 빨리 걸을 걸 그랬나' 같은 생각 들까봐.

번외3) 여기 온다고 선글라스 대신 색조안경을 맞췄다. 빛이나 외부 요인에 따라 렌즈에 색이 들어(?)온다. 실내에선 투명렌즈. 오늘 어쩌다 안경이 살짝 내려갔는데 안경 밖으로 본 스페인은 훨씬 밝았다. 늘 회(검정)색 필터를 낀 채 이곳을 봤구나 싶었다. 좀 더 밝은 색조, 다른 색온도. 다음엔 색조알을 끼웠다 올렸다 할 수 있는 안경이면 좋겠다. 물론 또 오(걷)진 않겠다만...

번외4) 잘 때가 다 돼서 쓰는 건데, 역시 사설(비싼)은 자리도 남고 쉬기 좋다. 그리 비싼 데가 아닌데도 비교적 조용하다. 친구가 그랬다. 휴식이 필요할 땐 사설 가라고. 역시 경험자의 짬바란.

번외5) 완전 회복.

번외6) 내 걸음속도로 다른 사람들 걷는 시간만큼 걸으면, 그러니까 알베르게들이 보통 문을 여는 오후 1시까지 걸으면 출발시간에 따라 대략 타인의 1.2배에서 1.5배까지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걸 해볼까 말까 고민 중. 답이 없는 일을 결정하는데 좀 더 익숙해졌으면... 물론 중간에 사진 안 찍고 카톡 안 하면 더 간다. 한 번 해봐?


오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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