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 Najera~Granon
1. 아침을 많이 먹어 걷기 힘들었다. 일어나는 것부터 고역이었지만 걷는 건 더했다. 풍족한 아침 뒤에 오는 좀비워킹. 희비가 교차한다는 건 아마 이런 것.
2. 반숙 달걀과 초코빵, 바게트, 버터, 바나나, 방울토마토, 허브티 등을 아침으로 먹었다. 이걸 다 먹었다. 먹을 때는 좋았지. 무엇보다 이 모든 걸 이미 어제 장보면서 해결해뒀다는 게 먹는 데 의무감을 부여했다.
3. 아늑한 숙소를 떠날 때 따르는 아쉬움. 무엇보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을 때는 종종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할 때가 있다. 백수. 이 달콤한 알람은 결코 잠을 깨우는 법이 없을 텐데.
4. 한 22km까진 그래도 괜찮다. 25km 안팎이 되면 그때부터 발바닥에 약간씩 통증이 생긴다. 가방 무게 탓일까. 계속된 행군이 부담이겠지. 숙소에 도착할 때마다 발바닥을 주무른다. 근육통 파스도 바른다. 나름 부상 없이 선방하는 이유.
5. 머무를 마을에 도착했는데 좀 작다. 게다가 스페인 휴일이라 가게들이 쉰다. 특히 슈퍼마켓. 다른 곳은 몰라도 슈퍼마켓이 쉬면 나 같은 순례자들은 적잖이 아쉽다. 벤딩머신에서 콜라나 하나 뽑아먹고 마을 산책. 근데 볼 건 없다.
6. 사설 갈까 도네티브 갈까 고민 하다가 도네티브 갔는데 나쁘진 않았다. 바닥에 매트 깔고 잤지만 뭐 괜찮다. 다만 희한하게 수면실 두 개층이 아시안(한국인)과 서양인들로 나뉘었는데 나는 서양인들 속에서 혼자 잤다. 자리가 협소한 것도 있었고 크게 상관도 없었고. 근데 층이 나뉜 건 좀 신기했다.
7. 이 때 내 옆자리 쓰는 서양여자애가 잘 때 팬티 차림으로 침낭에 들어가는 걸 보고 조금 당황. 물론 동공만 당황. 시선을 피해야 하나 무심한 척해야 하나 짧은 순간 깊은 고민.
8. 걷는 중 생긴 에피소드. 이스라엘 여자애 하나가 (자기 뒤쪽에서 걷던 나를 한참 기다리더니) "뒤 돌아보지 말아달라"고. 화장실에 갈 거란다. 풀숲 속. 알겠다고 한 뒤 내 갈 길 갔다. 한참 가다가 벤치가 나와서 앉아 쉬는데 얘가 뒤늦게 도착한다. 그렇게 통성명 하고 잠시 친구 먹음. 아마 돌아보지 않은 데 따른 신뢰감의 표현이 아니었나 싶고. 나보다 12살 어린, 군생활 마친 이스라앨 아이.
9. 기부제 숙소에 가면 주로 성당? 교회 가야 도장을 찍어주는데 이날은 뭔가 좀 그래서 안 가고 안 받았다. 차후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랬다.
10. 버스 타고 마을을 건너 온 한국인들이 여럿이다. 많이들 다친다. 몸부터 챙겨야 할 텐데... 이 길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걸까.
11. 잠자리에 들기 전 기침을 하자 일면식도 없는 서양애들이 여기저기서 "블레스 유"라고... 이런 문화를 어디선가 읽었는데 너무 조건반사적으로 말해서 뻘쭘.
오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