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혼자'

나의 산티아고, 14일째

by OIM

10.15 Burgos~Hontanas

1. 다시 혼자. 일행이던 '필립'은 대도시에서 재정비 시간을 하루 가진다고. 반나절이든 하루든 쉬고 가지 않겠냐는 걸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냥 떠나기로. 쉬면 다시 출발할 때 더 힘들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고.

2. 오늘 도착한 곳은 작은 마을. 마을 규모에 비해 알베르게가 많다 싶을 정도로 몇 있는데, 내가 고른 곳은 가장 안쪽(다음 마을로 가는 길목)에 있다. 가격은 대부분 비슷한데 규모 보고 결정했다. 가장 침상 수가 적은 곳으로. 쉴 땐 조금 조용한 곳이 당길 때가 있단 말이지.

3. 좋다. 시설이, 가격 고려하더라도 좋은 편이다. 부엌도 깔끔하고 샤워시설, 화장실, 세면장 모두 좋다. 이 가격에 이 정도면 한국서도 먹히겠다 싶을 정도. 다만 부엌을 쓸 수 있는 반면 마을에 슈퍼마켓이 하나도 없다; 이걸 예상 못 했네.

4. 위치 탓인지 오늘 이 숙소 숙박객은 나 혼자다. 처음엔 전세 낸 기분이 들어 너무 좋았는데 밤이 되자 살짝 무섭다. 우리나라랑 거의 반대편에 있는 타지에서, 그것도 주민 몇 살지도 않는 작은 마을 어느 숙소에 하필 그 많은 순례자들 묵지도 않아 혼자 잠을 청한다. 편한데 불편하다는 말이 이런 듯. 방문은 잠금 기능도 없고...

5. 요즘 지나는 지역은 바람이 특히 강한데, 이곳으로 오는 도중 풍력발전기(바람개비) 30여 기가 인근에 있는 걸 봤다. 그러니 대충 바람이 어느 정도 강한지 가늠할 수 있는데 지금도 창밖으로 바람인지 뭔지 모를 것들의 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6. 오자마자 뜨거운 물에 샤워한 뒤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핫도그 시켜먹고 잤다. 점심을 안 먹고 걸으면 허기져서 원. 에너지 빠져나가는 기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저녁은 피자를 시켰는데 기대했던 한국식 피자의 쫄깃함이 없어 조금 시무룩. 도우는 바삭했고 치즈는 얇았다. 다음부턴 샌드위치나 핫도그 해야지.

7. 이러나저러나 혼자 다니면 지출이 준다. 지출처를 좀 더 능동적으로 결정할 수 있달까. 오늘도 숙박, 점심, 저녁, 콜라3ea, 물 등 해서 3만 원도 안 썼다. 사실 엊그제 폭주하는 바람에 지출이 컸던 관계로...

8. 걷는 속도도 혼자 다니는 게 빠르다. 그러니까 아무 신경 안 쓰고 걸으면서 사진 찍다가 다시 걷다가 하니 시간당 5km 정도 나오는 듯. 어제보다 시간당 1km 더 걸은 셈. 어젠 장거리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오늘도 적게 걸은 건 아니니까.

9. 쉬지(쉬어가지) 않는 나를 보고 친구는 "레이스가 아니"라고 했다. 안다. 이게 내 일반적인 걸음 속도다. 이보다 빨리 걷거나 이 속도로 하루에 50km 정도 걷는다면 아마도 하루쯤 쉬어가야 할 거다. 근데 일반적으로 걸으면서 어디선가 하루쯤 쉬려고 하면 일부러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러니까 쉬기 위한 동기부터 마련해야 한다거나...

10. 자려고 누워서 이걸 쓰는데 아무래도 혼자다 보니 작은 소리에도 귀가 쫑긋. 이 건물에 나 혼자인 건지, 주인(아들과 엄마)들은 같이 머무르는 건지, 문은 잠긴 건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이 시기에 이 길을 걷는 순례자가 만 명 단위에, 구간마다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명씩 있을 텐데 하필 only one이라니. 몇 년 전 군산 선유도 어느 민박집 작은 방에서 평일에 혼자 머무르던 게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 때도 섬에 밤이 찾아오자 여기저기 불이 다 꺼지며 엄청 무서웠던 기억이 있는데...

11. 아참, 아침 기온이 4도까지 내려갔다. 비 온 다음 날이라 그런지 입김이 나왔다. 제법 손도 시려워 장갑을 끼지 않으면 체온 저하에 일조할 지경. 처음으로 걸을 때 패딩을 꺼내입었는데 걸으니까 덥고 벗으면 추운 애매한 상황에 직면해 이것 참 감기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겠구나 싶은.

12. 요 며칠간 외국인 친구와 다니자 한국어를 쓸 일이 없어 갑자기 할 말들이 영어로 떠오르는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테면 '와, 밥 먹고 가야겠다' 같은 생각이 'I should eat some'으로 치고 나온다든가.

13. 그래서 어려운 생각은 안 치고 나오는 경향이...


번외) 도시에 살면 볼 일이 드문 '매'를 봤다. 높이 날고 하늘을 빙빙 도는 그 매 말이다. 무리 짓는 습성이 있는 건지 꽤 여러 마리가 하늘에 떴고, 걸으면서 그것들을 관찰하느라 한동안 비틀거렸다. 실제로 매를 보자 미국에선 독수리가 갓난아이도 채 갈 정도로 거대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는데 매 역시 어느 돌무더기 옆에서 저공비행을 하는 모습을 보자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같은 뜬금 없는 생각이 들었다.

번외2) 걷는 거리가 늘어서 그런지 생장에서 출발할 때 못 본(낯선) 사람들이 근래 보인다. 나보다 하루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은데 그들도 나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번외3) 걷는 길에 있는 작은 성당에 들어가자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순례자들에게 도장(스탬프)을 찍어주며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말을 하고 계셨는데 '축복'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내가 알아들은 단어는 "마리아" 정도.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도 한동안 그렇게 얘기하셨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걸이 하나를 걸어주셨다. 왠지 모르게 소중...

번외4) 28.5km와 34.2km와 37.7km 사이에서 고민 중. 내일 걸을 거리 말이다. 제일 후자를 택한다면 내일 저녁부로 산티아고까지 거리는 430km대로 줄어든다. 거의 절반. 어떡한다.


오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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