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 Carrion de los condes~Sahagun
1. 눈치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참 멋진 것 같다. 눈치 보지 않는 척 하는 게 아니라, 그런 노력을 기울인 시간이 흐르고 흘러 눈치 보지 않는 일에 익숙해져버린 사람 말이다. 남을 귀찮게 하지 않고 자신 또한 귀찮게 하지 않을 줄 아는, 그게 생활이 된 사람은 다분히 매력적이다.
2. 어떤 한국 분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잠시 스쳐가는 분이지만 그에게서 배운다. 배운다기보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곳 스페인까지 와서도 나를 놓지 못하고 스스로를 괴롭혔구나. 그를 보며 생각했다. 숙소에서 하는 순례자 미팅이니 미사니 하는 것들을 살피며 좋다싫다 말도 못하고 눈치나 살금살금.
3. 순탄한 길이 계속됐다. 오늘은 그랬다. 다음 마을까지 거리는 시작부터 17km. 길 자체는 평탄해 지루한 감마저 들 정도다. 우중충한 하늘에 바람이 불었다. 흐린지 맑은지 모를 날씨가 순례자들을 살폈다. 걷고 또 걸었다. 구름의 그림자 사이로 기운 해를 보며.
4. 무언가 이렇게 꾸준히 한 적이 근래 있던가. 무작정 걷는 일. 한 달간 그냥 걷는다. 하루 12시간도 걷고, 5시간도 걷는다. 매일 같이 걷다 보니 바지가 헐렁 거린다. 발바닥이 아프고 피로가 쌓인다. 그래도 걷는다. 걷다 보면 오만 생각 다 든다. 잡상, 망상, 공상. 그게 옳다거나 좋다기 보다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 신기한 요즘이다. 이제 2주. 비단 2주로 생활이, 생각이, 신체가 이렇게 변하는 걸 보며 사람에겐 또는 내겐 무수한 기회들이 있었구나, 또 있구나 깨닫는다. 무슨 뜬구름 잡는 현학적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아니, 이게 이렇게?' 같은 기분이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5. 얼추 40키로미터 걸었다. 연이어 이렇게 걷진 못하겠다. 아마도 3-4일 정도가 한계라기보다 적당. 그 이상 걸었을 때 무릎이나 다리에 어떤 이상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어 시도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연달아 걸으면 어김 없이 피로감이 몰려오고, 하루쯤 푹 자 줄 필요가 있다. 어제 이걸 쓰다가 잠든 원인. 아마도.
6. 뒤늦게 온 한국분은 10유로 내고 2인실을 쓴다. 허나 더이상 사람이 안 와 2인실을 혼자 쓰게 됐다고. 그걸 듣고 나도 그냥 10유로 낼 걸 그랬나 싶었지만 사람 일 모르잖나. 나는 5유로 내고 4명이랑 같이 썼다. 다들 모르는 사이라 그런지 크게 소란스럽고 그런 건 없었다.
7. 숙소와 슈퍼마켓 거리가 불과 50미터. 운이 좋았다고밖에. 씻고 터덜터덜 걸어가 '레디밀'을 샀다. 조리가 돼 있는 식사를 레디밀이라고 한다네. 작은 컵라면과 산딸기 등을 샀는데 산딸기는 의외로 노맛. 어릴 때 뒷산에서 따먹은 게 훨씬 맛있고. 여긴 맛 없을 것 같은 게 정말 맛있고, 기대하면 덜하고 뭐 그런 듯.
8. 장 봐서 밥 먹은지 며칠이 지나며 느낀 건데, 생활물가가 싼 편이다. 한 1만 원 들고 가면 대략 저녁, 아침까지 배불리 먹는 듯. 다만 이 나라 식재료에 조금 더 익숙하다면 훨씬 나은 식사를 이어갈 수 있겠지만 그게 안 돼 아쉬울 따름. 2만 원이면 배 터지고 다음 날도 터지고 후식까지 먹을 듯.
9. 점심겸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 자려고 한 건 아닌데 일찍 잠들었다. 배가 부르고, 하체의 피로감이 그대로 올라오고. 어떻게 견딜 수 있겠나. 근 12시간을 잔 듯하다. 중간중간 깼지만 그 자체로 소중한 휴식. 이곳에 오고 나서 고스란히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것의 가치를 느끼는 중.
오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