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 Sahagun~El burgo ranero
1. 비 맞은 생쥐꼴. 길 위에서 이렇게 처량하긴 처음인 듯.
2. 걷는 내내 비가 내렸다. 10월은 '우기'라고 들었지만 듣는 것과 체감하는 건 정말이지 다르단 걸 몸소 겪는 중.
3. 방수 바지에 방수 바람막이, 레인커버를 씌운 배낭, 고어텍스 방수 등산화를 신고 그 위에 우비를 입었지만 날씨엔 장사 없다. 그치지 않는 비에 4시간쯤 걸었을까. 장대비가 아니었음에도 서서히 젖어오는 장비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쫄딱 젖었다.
4. 사실상 행동이 불가능해진 이유는 신발 탓이다. 제대 이후 걸을 때마다 물이 새어나오는 신발을 신은 건 처음이다. 이미 신발은 발을 보호하는 기능을 벗어나 물 머금은 경+중등산화가 돼 있었다. 이 상태로 더 걸으면 발 다 까진다. 어쩔 방도가 없다.
5. 예상보다 더 못 간 상태로 멈춰서자 멈춘 마을에서 머물 곳을 찾아야 했는데 상황이 거의 최악. 알베르게 수준의 숙소가 마을에 두 개 있는데 그 중 한 곳은 오늘 갑자기 휴업. 나머지 한 곳은 1시간 30분 뒤에 문을 연다. 작은 마을, 레스토랑이나 바 자체가 2-3곳에 불과한데다 문 연 가게도 안 보였다. 비가 내리니 체온이 떨어지고 걸을 때마다 신발이 질척인다. 이미 장갑도 물을 머금어 쥐어짜면 물이 줄줄 흐르는 상황.
6. 이전 마을은 7km 가량 돌아가야 한다. 다음 마을은 13km 가야 나온다. 우비를 입은 몸통 부위를 제외하곤 온 몸이 젖었다. 추웠다. 움직일 때 젖은 발이 흐물거렸고, 기껏해야 문 닫힌 건물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거리에 사람은 없고 실로 처량했다.
7. 이번에 알게 된 건데, 비에 젖어 한 곳에 15분 동안 서(가만히) 있으면 많이 춥다. 그래서 동네를 돌다가 쫄딱 젖은 순례자들 받아주는, 문 연 레스토랑 한 곳을 찾았는데 '신라면3.5유로, 햇반4유로'라고 보드판에 딱! '한국어 메뉴 있어요'라는 말도 딱! 오, 세상에.
8. 이 마을과 전 마을 사이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있는 걸 봤다. 길가에 눈을 뜨고 그대로 쓰러져 죽어있더라. 그냥 가기 그래서 잠시 합장(?) 하고 왔다. 네가 도운 걸까.
9. 오늘처럼 완전히 젖은 건 처음인데다 이걸 말릴 수 있을까 의문이었고, 비가 오지 않더라도 흐린 날이 이어지면 필연적으로 지출이 는다. 심지어 여긴 드라이머신 돌려도 양말은 반드시 덜 마르기 때문에... 갈 곳 잃고 비 맞고 돌아다니니 집에 가고 싶단 마음이 간절했는데 라면이랑 햇반 먹고 기운 회복. 와, 맛있더라. 신라면 원래 안 먹는데 진짜 맛있더라.
10. 설거지 필요 없게 싹싹 긁어먹었다.
11. 죽으란 법은 없나. 마을의 유일한 숙소엔 난로가 있었다. 장작을 떼고 있었고, 앞서 도착한 몇몇이 신발을 그 앞에 둔 채 말렸다. 나도 동참했고, 밤이 되자 내 신발은 바짝 말랐다. 깔창을 난로 가까이 뒀다가 변형된 건 안 자랑...
12. 밖엔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숙소엔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른다. 그 앞에 젖은 신발 한무더기와 축축한 옷가지들이 자리했다. 그보다 바깥쪽으로 사람들이 둘러앉아 차를 마시거나 와인을 마신다. 하몽으로 입가심을 하고 담소를 나눈다. 각자의 언어로 서로의 이야기를 한다. 비가 내린다. 그런 날의 집안 풍경.
13. 알베르게 직원(봉사활동 하는 분)이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려줬는데 정말 바짝 말려줬다. 빨랫감이 쌓인데다 몸에 걸친 모든 것이 젖어 속수무책이던 나를 이렇게 또 살려놓는다. 이 우연한 친절이 한국으로 향하던 내 마음을 스페인에 다시 심는다.
오늘의 사진) 너무 젖은 날이라 사진이 없다. 아무 것도 꺼내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