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랄까

일기 시작

by OIM


# 프롤로그

펜을 놓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쓸 곳을 잃어버린 탓이 컸다. 일기장으로 쓰던 블로그를, 나를 아는 누군가에게 들켜버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게 될 사람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장난처럼 여겼던 우려가 현실이 됐다. 특별한 일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생길 것을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지만 나를 아는, 일기로 나를 알아갈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은 정보 비대칭에 대한 불안을 심화시켰다. 반짝 고민했고, 새 둥지를 틀었다. 오늘은 집들이인 셈이다.



# 오늘

날이 차다. 티브이에선 연신 최강 한파가 찾아왔다는 뉴스를 내보낸다. 잠시 커피를 사러 나간 사이 날씨를 체감했다. 구스 점퍼 속으로 한기가 서렸다. 돌아와 다시 티브이를 봤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기상캐스터의 옷에서 괴리감이 들었다. 왜인지 알 수 없다. 아마 이렇게 추운 날에 패딩 정도는 입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관념 탓일 게다. 그런 차림으로 영하 10도를 강조해봤자 하나도 와 닿지 않아, 뭐 그런 생각을 해봤다.


오늘도 라떼. 변함없다. 떨리는 손에 따뜻한 커피 한 잔 쥐고자 아이스를 마다했다. 사실 아이스는 조금 더 비싼데, 매번 얻어먹는 입장에서 아이스를 고집하기도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어쨌든 여러 이유가 맞아떨어져 뜨끈한 커피를 손에 들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냉방에 하나 있는 커피의 온기는 귀중하다.


일이 없다. 아니, 많지 않다. 그중에 오후 일정을 받았다. 스포츠 하나에 인터뷰 하나. 그리 어렵지 않다. 빠른 마감이 관건이다. 이와 별개로 새벽에도 일이 있다. 당직이니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기보다는 잘 된 일이다. 무사히 일을 마치면 내일은 쉴 수 있다. 새벽이라 도로도 별로 안 막힌다. 월요일을 앞둔 밤은 소란이 없다. 일만 제대로 끝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오랜만에 일기를 쓴다. 글이 중구난방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쓴다는 건 이런 건가 싶다. 예전에도 짜인 듯한 글을 쓰진 않았다. 그럼에도 할 말이 비교적 명확했다. 지금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단문으로 친다. 그렇게 하루를 토막 낸다. 토막 난 일상을 문장으로 그린다. 보이는 하루를 써 내려가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생각대로 되면 내가 작가를 하지. 그러니 이건 죽은 손에 펜을 쥐어주는 토템적 의미일지도 모른다. 다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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