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파리에서 생쟝으로

[벌써 1년] ✈︎산티아고 기념 일기

by O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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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했을 땐 어느새 어스름이 짙었다. 공항 부지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예약해뒀기 때문에 수하물을 찾고도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정류장 위치를 확인한 뒤 창밖을 잠시 음미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그 '파리'였지만 딱히 실감은 안 났다. 단지 도시 저편으로 달아나는 석양이 참 예뻤다. 자국에서 비행기로 14시간 거리에 혼자 남겨진 뒤론 어느 정도 여유도 달아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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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근처에 숙소와 식당 등이 있다. 그곳들을 연결하는 건물 로비에 앉아 버스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다소 배가 고팠지만 나는 긴장했고,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12시간가량 되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는데, 파리는 정말 다양한 인종들이 모이는 듯했다. 국제공항인 탓도 있겠지만 '멜팅팟'이라 불리는 캐나다보다도 다양성 면에서 훨씬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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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출발한 지 20시간 가까이 흐른 상태. 피로를 짊어진 채 콘센트가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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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버스에 올랐다. 시계를 보면 알 수 있듯 야간 버스다. 그래 봤자 12시간 이상 이동하기 때문에 다음날 점심 때나 돼야 목적지에 도착한다. 특이했던 점은 중간 정차지에서 기사가 한 번 바뀐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12시간에 달하는 과로(?)를 이 나라에서 허용할 리 없다. 밤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심야 버스에 몸을 싣고 무사히 프랑스 남서부의 바욘(Bayonne)에 도착하길 바랐다. 바욘은 생쟝으로 넘어가는 기차가 다니는 중간 경유지다. 테제베나 비행기 대신 버스를 이용하면 이동시간도 길고 경유도 해야 하지만 가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하다. 나는 돌아갈 곳 없는 백패커니까 테제베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발생한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일정 부피나 무게 이상의 짐을 들고 탈 수 없게 돼 있어 짐칸에 배낭을 실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정작 스페인보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도난을 조심하란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고, 남들은 안 하는 짓을 짐칸에서 하다가 갇히고 만다. 빨랫줄로 쓰려고 가져간 와이어와 자물쇠로 내 배낭을 짐칸 봉에 묶고 있었던 것. 모두가 짐을 두고 나간 곳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기사 아저씨는 짐칸 문(전자식)을 닫았고, 나는 그 안에서 "Hello?"와 "Anybody?" 등을 외치며 짐칸 천장을 한동안 두드려야 했다. 갇힌 시간은 불과 1~2분 남짓이었지만 '이러다 출발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여담이지만 앞서 밝혔듯 버스 이동 시간이 12시간 이상이다. 짐칸은 경유지마다 열리고, 경유지는 목적지까지 4~5곳가량 된다. 야간 버스다 보니 주인이 잠든 사이 혹은 시야 사각에서 배낭을 들고 가버리면 배상이나 책임 문제가 복잡해진다. 때문에 나는 버스가 멈출 때마다 의식적으로 눈을 떴고, 이런 내 행동이 가뜩이나 피곤했던 여로를 더욱 힘들게 한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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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로 치면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 화장실을 이용하라고 승객들을 내려줬는데 화장실 송풍기가 다이슨이라 찍었다. '여긴 별 게 다 다이슨'이라는 생각을 잠결에도 한 것 같다.


☀︎☀︎내가 경유지마다 눈을 떠야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곳 휴게소에서 볼일을 마친 후 버스가 출발하는데 승객 한 명이 미쳐 버스에 못 탔는지 뒤에서 전력질주로 따라오고 있었다. 급기야 내부 승객들이 말을 해주고 나서야 버스 기사는 차를 세웠다. 나는 이 허술한 시스템을 목격한 뒤 졸음이 어느 정도 달아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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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욘에 있는 기차역 풍경. 기차에 올라 떠나가며 사진을 남겼다. 떨어지는 햇살이 예쁜 날이었는데, 집 나온 지 30시간 지나도록 제대로 쉬지 않으면 이곳이 바욘인지 도봉산인지는 대체로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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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생쟝(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했다. 이때가 집 떠난 지 얼추 36시간 가까이 됐을 무렵이다. 이곳에 있는 순례자 사무소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아야 비로소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 묵을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순례자 사무실로 향했다. 배낭을 메고 있는 거의 모든 이의 목적지는 그곳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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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은 앞선 사람을 따라가는 게 제일. 지도 앱이 있었지만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당시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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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사무소가 있는 거리와 순례자 사무소를 알리는 간판(우)이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낯선 풍경과 이색적인 건물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데 충분했다. 도착 당시 순례자 사무소가 문을 열지 않아 몇몇은 그 앞에 가방을 둔 채 대기했고, 일부 사람들은 밥을 먹으러 흩어졌다.


☀︎☀︎나는 한동안 순례길에서 한국인들을 피해 다녔다. 초반에는 그런 경향이 강했다. 그 이유가 이곳에서 비롯된다. 이날 사무소를 찾은 순례자들 대다수가 한국인이었는데 그 비율이 너무나 치우친 나머지 '이거 명동 아니야?'라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나를 비롯해 몇몇 한국인들은 사무소 개장을 기다렸는데, 이때 전날 도착한 한 한국인(남성)이 사무소 앞으로 다가와 다른 한국인(여성)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했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미리 연락을 취하던 사이인지 모르겠으나 "힘들면 내가 너의 '동키(짐꾼)'가 되겠다"거나 "(순례길을) 내가 다 알려주겠다"는 식의 구애는 사무소 문이 열릴 때까지 이어졌다. 가뜩이나 '한국인밖에 없다'는 인상을 받던 나는 '여기서마저...'라는 추가 타를 얻어맞고 계획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이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한국인들은 순례길 중반부까지 꾸준히 잡음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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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사무소가 위치한 길 안쪽에 생쟝에서 가장 유명한 알베르게 중 한 곳이 있다. 공립(저렴)이고 수용 규모도 다른 곳(사립) 보다 큰 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들 중 많은 이들이 그곳을 첫 숙소로 선택한다. 나는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는 동안 그곳에 상당수 한국인들이 몰려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일부는 이미 친목을 도모 중이라는 소식도 들었다. 나 역시 공립 알베르게 위주로 묵을 예정이었지만 앞선 인식들이 내 선택에 영향을 미쳤고, 이날 나는 생쟝에서 가장 비싼 알베르게 중 한 곳에 등록한다.


☀︎☀︎숙소는 가격과 후기를 보고 선택하는 게 좋다. 이날 숙소도 공립을 제외한 곳에서 후기를 보고 골랐다. 다소 비싸지만 작은 규모에 조용하고, 한국인이 없었다는 어느 한국인의 평가가 유효했다. 실제로 이 알베르게 가격은 공립의 2배가량이지만 무척이나 조용하고 아늑했다. 프랑스인 아주머니가 주인이었으며 가정집 2층을 순례자 숙소로 꾸몄다. 이날 나는 이곳에서 물집으로 발바닥 껍질이 거의 한 꺼풀 벗겨져버린 프랑스인 아저씨와, 젊은 미국인 커플, 캐나다인 할아버지 둘, 미국인 할머니와 숙소를 함께 썼다. 오직 일곱 명이 숙소를 공유하는 일은 다소 드물지만 쾌적한 일이라는 것을 이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심지어 캐나다 할아버지들과 미국인 할머니는 각각 다른 방에 짐을 풀어 우리 방엔 침상 7개에 4명만이 잠을 청했다.


☀︎☀︎☀︎내가 유럽에 있다고 또 한 번 느낀 게 뭐냐면, 미국인 커플이 샤워실에서 씻은 뒤 속옷만 입고 침상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팬티만, 여자는 브라탑과 팬티 차림. 이런 일을 이후에도 몇 번 겪는데 이때가 내 고민의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눈을 돌려야 매너인가, 자연스레 보는 것이 매너인가. 나는 동양인의 모습으로 서구의 문화를 피하지 않겠다고 합의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때쯤.


☀︎☀︎☀︎☀︎사진은 한동안 숙소에 나 말고 아무도 오지 않길래 마을 마트에서 구입한 초코빵을 침상에서 뜯어먹다 남긴 모습.


☀︎☀︎☀︎☀︎☀︎여담이지만 내가 이 마을에서 가장 당황한 것 중 하나가 언어문제다. 나는 불어나 스페인어를 하나도 할 줄 몰랐는데 밥을 사 먹으려고 보니 식당에 적힌 글자가 대부분 알 수 없는 의미였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식당에 들어가야 할지 결정하기가 상당히 애매해졌고, 막상 들어섰는데 메뉴판도 이 모양이라면 이것 참 낭패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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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사무소에서 발급받은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어준다. '세요'라고도 한다. 각 마을에 위치한 알베르게에서 날짜와 숙소 고유의 문양을 찍어주는데 이걸 모으는 게 또 재미다. 좌측이 순례자 사무소 도장, 우측이 첫 알베르게 도장이다. 프랑스길 출발지인 생쟝의 상징으로 참 적절하다 싶다. 그러고 보니 주인아주머니가 '부엔 까미노'도 적어주셨구나. 감사하게도.


☀︎☀︎숙소에서 1박 후 어스름이 걷히기 전 길을 나섰다. 숙소에 묵었던 순례자들(미국인 커플 제외)과 주인아주머니가 다 같이 아침을 먹는데 희한하게 정겨운 분위기가 형성됐다. 다들 처음 만났는데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식사 자리에서 잠시 하게 됐고, 그래서인지 주인아주머니와 미국인 할머니는 내가 먼저 떠나려고 집 앞을 나설 때 문 앞까지 따라 나와 배웅을 해줬다. 이날 나는 처음으로 프랑스식 인사를 접했으며 "챠우챠우(Tchau Tchau)"가 무슨 말인지 한동안 계속 생각하게 됐다. 주인아주머니가 인사하고 또 배웅하며 챠우챠우를 대여섯 번은 말한 것 같아서.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말이 '바이 바이'의 어린이용 버전 같은 건 줄 알았다. 챠우챠우가 주는 어감 때문에 말이다. 근데 그냥 헤어질 때 하는 인사라고?


☀︎☀︎☀︎이번 산티아고 시리즈에는 폰으로 찍은 스냅사진과 스낵식 감상만 올리려고 했으나 그날 아침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어서 부득이하게 카메라 사진을 끼운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작에 익숙하지 않아서 분위기만 전한다.


KH000242(편집_리코).jpg 주스 아저씨가 프랑스인, 나머지 남자 둘이 캐나다인, 우측이 미국인 할머니. 주인아주머니는 앵글 밖. Ricoh GR3 @Saint Jean Pied de Port, France

☀︎검은 옷 입은 아저씨가 같이 방을 쓴 친구한테 뭐랬냐면 "내 손에 총이 있었으면 너는 오늘 눈 뜨지도 못했다"며 "네가 코 고는 소리를 다른 방 사람들도 다 들었다"라고. 그러면서 나한테 "들었냐, 못 들었냐"고 물어본다. 내가 "들은 것 같다"고 받았더니 "봤냐(see?)"며, "쟤도 총이 없었다"고 농담을. 참고로 저 둘은 와이프가 같이 안 온다고 해서 친구랑 왔다고 한다. 나이 먹고도 이런 농담 할 수 있는 인간상 너무 좋아.


☀︎☀︎이때 분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이날 아주 큰 시련을 마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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