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년] ✈︎산티아고 기념 일기: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밥을 먹고 배웅까지 받으며 오전 7시쯤 숙소를 나섰다. 해는커녕 여전히 별이 또렷한 빛을 발하는 하늘을 위에 두고 길을 떠났다. 다행히 길에는 이미 순례자들이 여럿 보였다. 혼자서 묵묵히 갈 길을 가는 이도 있었고 무리 지어 도란도란 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었다. 나도 이들을 이정표 삼아 걸음을 옮겼다.
☀︎☀︎피레네 산맥 초입에서 위기를 맞았다. 속이 안 좋았다. 조금만 더 가면 화장실이 있지 않을까, 구간마다 간이화장실을 마련해둔 한국의 그것을 예상했지만 여긴 '순례자의 길'이었다. 더군다나 오가는 이라곤 (아마) 순례자들 밖에 없을 산맥에 굳이 화장실을 설치하는 것도 낭비일 터다. 하지만 당시 나는 힘든 데다 괄약근까지 말을 안 듣기 시작하며 논리적인 사고 따위 할 수 없었고, 엄폐물을 찾기 시작했다. 산맥 아래선 그나마 보이던 나무들도 산맥에 오르자 길에서 한참을 벗어나야 했다. 게다가 길이 길어 어느 곳에서 주저앉든 다른 각도에서 보일 것 같았다. 그렇게 어쩔 수 없다며 비비 꼬인 걸음을 옮기다가 일이 터졌다. 인내심이 무너진 것이다.
☀︎☀︎☀︎길에 가방과 스틱을 내팽개치고 휴지를 꺼내 풀숲으로 뛰었다. 지나가는 이들이 쳐다보면 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잠시 같이 걷던 일행들을 보내며 응까를 싸겠다고 알렸다. 일행들은 앞으로 향했으나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풀숲은 구부리고 앉아 자세를 잡아도 어깨까지 밖에 가려주지 않았으며 그마저 무성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길에서 위쪽으론 돌밭이었으며 아래쪽으로 풀숲이 조성돼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온다면 '나 똥 싸고 있어요'라며 얼굴로 인사할 수밖에 없는 위치, 그곳에서 나는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옷 입고 터지면 이 길은 정말 끝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훈련병으로 돌아간 것처럼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다행히 다음 일행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전 가방을 다시 멜 수 있었는데 이 일을 겪은 뒤 아침에 우유나 주스 등 현지 음식을 배불리 먹는 일을 피하게 된다.
☀︎☀︎☀︎☀︎피레네의 코리안 똥싸개란 별명은 피하고 싶었다.
☀︎생쟝에서 다음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는 대략 25km 거리다. 나는 이 거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수치상 20km대 정도는 거뜬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산맥을 넘어가는 25km는 꽤나 달랐다. 도보로 25분 거리와 등산로 25분 거리가 다르고, 등산로 25분 거리와 군장 메고 등산 25분이 다른 것처럼 이 25km는 모두가 예상하던 25km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날은 오전부터 비가 왔다. 10km도 못 갔는데 부슬비가 쏟아졌고, 산지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 시작했다. 문득 어제 순례자 사무소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순례길 통틀어 가장 힘든 길로 꼽히는 게 이 피레네 산맥 구간입니다." 나는 그 길을 비 오는 날 넘게 된 것이다.
☀︎☀︎빗줄기는 약해졌다 강해졌다 변덕이 심했는데, 수시로 바람을 타자 가로로 내렸고 얼굴을 때리며 호흡과 시야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시야에 바위만 들어오면 주저앉고 싶었다.
☀︎☀︎☀︎걷는 속도에 따라 길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걷기도 하는데 이날 나는 잠시 미국 친구와 발을 맞췄다. 둘 다 힘에 부쳐 콜라를 먹고 싶다, 코코아를 먹고 싶다 따위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정말 힘들다'는 이야기를 나눌 때쯤 스낵카가 나타났다. 안개로 가시거리가 20미터 남짓인 데다 커브길 뒤에 숨어 있어서 갑자기 스낵카가 나타난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신기하게도 이곳에서 코코아와 콜라를 모두 팔고 있었다. 스낵카가 너무 극적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잠시 '이 사람, 하나님 아닌가?' 의심했다.
☀︎☀︎☀︎☀︎원하던 대로 미국 친구는 코코아를, 나는 콜라와 바나나 두 개를 사 먹었다. "와... 와..." 거리며.
☀︎쉬고 싶었는데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잠시 바위에 앉았더니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나나 껍질을 버리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면 멈췄다 가는 사람, 천천히 걷는 사람, 물 마시는 사람 등 순례자들을 마주치기 마련이다. 이날 특이한 조형물이 눈에 띄어 구경하러 갔더니 다른 순례자들이 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걸 뒤에서 사진으로 남겼는데 며칠 뒤 이 일행을 다른 숙소에서 만난다. 둘은 브라질 사람으로 부부관계인데 남자(마르코)가 포토그래퍼다. 같은 관심사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사진을 보여주기에 이르렀고, 이 사진을 보며 마르코가 "우리 나왔다"며 알려줘서 알았다. 신기한 인연.
☀︎☀︎마르코는 자국에서 사진기자와 포토그래퍼로 일했으며 여전히 그 일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순례길에 카메라 장비를 다 가져왔다. 렌즈까지 챙겨 왔다. 이걸 보고 '아차' 했다.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필름 카메라를 두고 온 게 생각났다. 필름 수급이나 운반의 어려움 등으로 포장한 '현실'이란 건 그냥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는 것을 배운다.
☀︎☀︎☀︎마르코는 차후 짐이 무거워 발목에 테이핑을 하며 페이스가 많이 느려지기도 하는데 배낭에 카메라 장비까지 메고 다니면 놀라운 결과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와이프와 함께 완주했고, 기록으로 남긴 사진으로 전자책까지 발간한다. 대단했다.
☀︎똥, 그것은 비공식 이정표 같은 것. 피레네 산맥에 똥 진짜 많다. 산 곳곳에 방목하는 가축들이 있어서 그렇다. 처음엔 똥을 보며 '으익'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똥이 보이면 제대로 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심지어 누가 밟은 자국을 보면 사람이 지나간 길이라며 안심.
☀︎이날 조금 공포스러웠던 점이 뭐냐면, 가시거리가 너무 짧아서 사람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같이 걷던 이들이나 앞선 사람들과 조금만 멀어져도 사람이 안 보였다. 비까지 내리니 시계는 악화일로였고,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이런 상황은 공포심을 주기 충분했다. 고요한데 마을까지 얼마나 남은 상황인지 파악도 힘들었고 우천에 폰을 꺼내 지도를 보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 숨은 턱끝까지 차오르고, 걸음을 멈추면 이따금 산중에 돌아다니는 가축들의 목에 달린 방울 소리만이 바람과 함께 귓전을 때렸다. 딸랑... 딸랑...
☀︎☀︎중간 사진에서 알 수 있듯 곳곳에 갈림길이 있는데 사람이나 표지판이 잘 안 보이니 길을 가면서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물어볼 사람도 안 보이고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아예 다른 길로 빠져 갈수록 사람을 만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던 시간.
☀︎'이 길이 맞대.' 이런 식으로 곳곳에 안내판이나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인공 구조물을 설치해놓은 게 보인다. 물론 이 또한 피레네 산맥에서 어느 정도 내려와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청목이들은 잘 살고 있으려나. 이런 부류의 낙서는 순례길 내내 마주하게 된다.
☀︎이날 날씨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보여주는 사진들. 사진에 보이는 안갯속으로 진입하면 사진을 찍었던 장소가 안 보이는 신기한 날씨였다. 친구가 피레네 정상에 도착해서 숲 속을 돌아보면 길이 빙빙 도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지나온 숲길을 돌아봤더니 미궁 등을 다루는 영화의 특수효과처럼 길이 다소 일그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우측 하단 사진을 보고 나서야 조금 안도했다. 보통 중세를 배경으로 한 게임 등에서 저럼 울타리 표식으로 다음 마을의 출현을 알린다.
☀︎론세스바예스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의 신발장. 궂은 날씨에도 발을 보호해준 등산화의 방수 효과에 놀란 날. 순례자들은 대부분 알베르게에서 이런 형태로 신발을 두고 가는데 도난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
☀︎☀︎추후 적을 일이 있겠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며칠 뒤 신발 도난으로 인한 해프닝이 발생한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접수를 마치면 침상을 배정받는다. 선착순이기 때문에 오는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한다. 남녀 구분 같은 건 없는 편. 이곳은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 최근에 리모델링 한 곳이라고 했다. 공립인데 사물함까지 있는 곳은 상당히 준수한 편. 과거 친구가 왔을 땐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고. 원래는 수녀원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알베르게 지하에 있는 세탁실이다.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할 수 있다. 이곳은 돈을 내면 자원봉사자들이 순례자들의 빨래를 받아다가 세탁을 돌려줬다. 나는 세탁물이 얼마 안 돼 손빨래를 했다. 건조기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빨래를 말릴 수 있도록 이런 식으로 알베르게마다 빨랫줄을 구비해 두는 편인데 이 역시 도난이 발생하지 않을지 내심 불안했다. 나중엔 어느 정도 달관하게 된다.
☀︎☀︎우기엔 빨래가 잘 안 마르기 때문에 대부분 건조기를 쓰거나 모아뒀다가 맑은 날 세탁과 건조를 하곤 한다. 이 곳은 세탁실을 저녁에 잠가놓는 편인데, 그 안에 히터가 나오기 때문에 빨래가 마를 것이라고 자원봉사하는 분이 알려주셨다.
☀︎☀︎☀︎도착해서 샤워하고 침구 세팅, 빨래까지 하고 나면 일과가 어느 정도 정리된다. 자거나, 당을 보충하거나 하는 식.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준비해주는 것을 먹기로 하면서 독일인 순례자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