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x도난사고

안도하는 소시민

by OIM
Ricoh GR3 @Spain





순례자의 길은 낭만이 있다. 여유도 있다. 800km를 한 달간 걷다 보면 없던 여유도 생긴다. 옆 사람이 보이고 살아온 내가 보인다. 그런 과정이 구전된다. 공유되고, 또 그려진다. 산티아고에 대한 낙관은 그렇게 세간에 퍼진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이런 클리셰는 순례길에도 적용된다. 이렇게까지 말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이란 일어나기 마련이다. 당사자를 당황케 한 비극을 소개한다. 별일 아닌 별난 일이다.


앞서 소개한 적이 있다. 론세스바예스 숙소 때다. 신발장에 신발을 두고 다녀도 도난이 없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당시 언급했다. 그 일화가 여기서 발생한다.


이날도 평소처럼 길을 걸었다. 들길을 지나 지하도를 빠져나온 뒤 커브길을 돌아 지상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사진에 나온 여성분(뒷모습)이 저 멀리서 나를 쳐다봤다.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모습이 전신을 훑는 모양새라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이상했다.


여성은 내가 바로 옆을 지날 때 말을 걸었다. "그거 네 신발이니?" 그러고 보니 여성은 슬리퍼를 신고 순례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등산화는 여성 옆에 놓여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다. 숙소에서 누가 자기 신발을 신고 가버렸단다. 그 신발이 내 신발과 같은 브랜드에 디자인도 유사해서 쳐다봤다고 설명했다. 그 사람이 두고 간 신발은 신을 수가 없어서 알베르게에 요청해 슬리퍼를 빌렸단다. 그리고 통행 구간에 도착해 그 사람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언제 어디로 지나갈 줄 알고 여기서 기다릴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순례길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일어날 거라고도 보지 않았으니까. 내 알리바이는 어제 올린 사진의 스페인 친구가 증명해줬다. 우린 너(여성)와 다른 숙소에서 출발했으니 네 신발일 리 없다고.


그는 우리가 그곳을 지나친 뒤에도 그곳에서 순례자들의 신발을 확인했다. 산길을 오르고 고개를 넘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희망으로 그 자리에 섰겠지만 나는 그게 더 절망적으로 보였다. 가능성 면에서 그랬다.


이런 일이 생기면 순례길 일정이 꼬인다는 점에서 곤란하다. 오늘 30km를 걷고, 내일 25km를 걸으려고 했는데 차질이 생긴다. 같이 걷던 동료들과도 헤어져야 한다. 신발을 찾지 못하면 신발 상점이 있는 마을까지 차를 타고 이동했다가 돌아오거나 그곳에서부터 걸어야 한다. 이 과정에 지나치는 순례길 구간*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번거로운 일들을 해결해야 한다. 신발도 브랜드 제품은 고가다. 여비 문제가 뒤따른다.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순례자 사무소에서 완주증을 받는다. 이때 순례자 여권에 받은 고유의 도장(숙소나 상점 등에서 찍어준다)으로 순례자가 걸어온 거리를 계산한다. 지나친 구간이 있으면 티가 난다.


당시 나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안타까운데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기분. 이 모순을 걷는 동안 정리했다. 장시간 걷다 보면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을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게 순례길의 매력이다. 민낯을 윤리적 시비가 아니라 개성의 문제로 수용할 수 있도록 그 긴 길이 돕는다. 이러니 한 번 걸은 사람은 그 과정에 반할 수밖에 없다.





Ricoh GR3 @Spain





풍광이 예쁜 마을이었다. 마을 초입 벤치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계셨다. 단조로운 길을 걷다가 마주한 그림 같은 마을에 혼자 계신 할아버지라니, 찍을 수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웃었고, 나는 찍었다. 어르신들은 대체로 좋은 표정을 보여주시는데 이 분도 그랬다. 사진을 마음에 들어하셔서 그게 참 다행이었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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