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낙하

오른 만큼 떨어진다

by OIM

아, 피곤하다. 뭐야. 왜 이래. 별 말 다 나온다. 이래저래 멘탈이 털린 느낌. 정제된 글을 쓰기엔 기분이 엉망이다. 덩달아 머릿속도 복잡하다. 미로 속에서 곧은길을 향해 나아가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런 길이 애초에 없는 것만 같은 절망적 느낌. 안다. 출구는 있는 거. 그냥 해본 소리다. 볼멘소리. 나도 가끔은 하고 싶다. 주변에서 하는 "너는 잘 하니까"라는 말이 서운할 때가 있다. 가끔. 아주 가끔. 그게 오늘이다. 몰라. 그렇다.




1. 내가 그랬다. 회사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순조롭다고. 며칠 전에 쓴 일기에 적혀있다. 그게 불안해 적었다. 어쩐지 그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나쁜 느낌은 빗나가는 일이 없다. 영화처럼, 소설처럼, 때론 만화처럼. 엉망진창인 상황을 정리하는 건 그 정도로 충분하다. 이거 웃긴데.



2. 칼퇴에 큰 부하 없는 업무로 점철된 회사가 반가웠다. 이제야 평안이 찾아오나 했다. 기자질을 그만두고 찾은 안식처 같았다. 이런 직장을 찾다니 횡재했다는 기분도 잠시 들었다. 앞선 불안이 잠식하기 전까지 그랬다. 찰나의 순간을 나는 즐겼다. 충분했나? 빌어먹을 충분했다.



3. 이상했다. 전임자가 나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2개월 남짓 근무했던 전임자의 자취를 '휴지통'에서 찾았다. 컴퓨터를 뒤졌다. 근무기간 2개월에 동반 퇴사. 뭔가 있다. 눈칫밥 먹어 오던 나도 그 정도 읽었다. 있는데 알 수 없다. 심지어 이런 근무 환경을 박차고 나갈 정도면 없어도 뭔가 있다. 그랬다.



4. 실무진과 임원진의 갈등이라고 들었다. 처음 찾은 단서는 그거다. 언론사는 아니지만 글쟁이 포지션으로 뽑아놓고 업무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단다. 이른바 글쟁이 스킬을 쓰려고 뽑은 거지 글쟁이의 자존심까지는 보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출근 뒤 며칠, 나도 느꼈다.



5. 타인이 쓴 글이 있다. 기자나 에디터가 썼다. 글 아래 저자 이름이 달린다. 출판물이다. 취재도, 글도 그 사람이 썼다. 이걸 나에게 고쳐달란다. 민감한 문제다. 글쟁이들에겐 그렇다. 타인의 창작물을 허가 없이 고치는 일은 일종의 도전이자 도발이다. 그렇다고 내게 저자와의 교감이 있었나 하면 그도 아니다. 한데, 왜.



6. 이런 일도 있다. 기사를 쓰란다. 자료를 준다. 두 가지 사안에 대한 기사 두 개다. 지시에 맡게 기사를 썼다. 행사 예고 기사 두 개다. 그마저 육하원칙도 부족하다. 채워야 하는 부분을 비워두고 썼다. 자료를 요청했더니 없단다. 그 결과 기본 요건도 못 갖춘 기사가 나왔다. 정보를 확인할 근거나 출처도 불명확하다. 어쩔.



7. 일과 시간이 지나면 회사에 앉아 보도자료를 봤다. 기자로 일할 때다. 부서 메일로 쏟아지는 하루 100여 통이 넘는 보도자료 중 쓸만한 것과 아닌 것을 골랐다. 그걸 업으로 삼던 내게 기본도 안 된 기사를 쓰게 한다. 기본이라도 갖춘 결과물을 줄 테니 자료를 달라고 해도 없다고. 책임자는 대체 누군가.



8. 제안서도 썼다. 일종의 제휴 제안서다. 회사가 가진 매체를 모 플랫폼에 등록하려는 시도다. 내게 지시가 떨어졌다. 출근한 지 5일째 벌어진 일이다. 인수인계도 못 받아 일을 찾아 하던 내게 회사를 대표하는 제안서를 쓰게 했다. 자료는 역시 없단다. 그 결과 제안서를 직접 '창작'했다. 육망성이라도 그릴까 보다.



9. 내가 전담한 매체는 어떨까. "마음대로 바꿔보라"고 했지만 지원 예산은 '0'원이다. "예산이 들지 않는 선에서"라는 전제조건은 의지를 쉽사리 꺾었다. 지원인력도 없으며 가용 인원(필진)도 알 수 없다고. 성과를 먼저 보여야 지원도 요청할 수 있지 않겠냐는 원론적인 말을 면담에서 듣고 나왔다. 지친다.



10. 덧붙이면 매체 하나를 만드는데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 이 조직은 감이 없다. 감이 없으면 협조라도 해야 하는데 협조도 궁색하다. 혹자는 매체 창간을 위해 컨설팅을 맡기기도 한다. 작은 매체라도 데스크급과 실무진 여럿이 달라붙어 힘을 모은다. 근데 내게?



11. 그렇게 만든 매체의 가치는 어떨까. 대표적으로 'ㅍㅍㅅㅅ'를 보자. 단순히 페이지뷰로 셈하더라도 중견 언론사와 견준다. '일베'는 어떤가. 사이트 존재의 시비 판단을 떠나 판매가가 10억대를 넘었다는 말을 웹에서 접했다. 이쯤 되면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이라는 식을 의심해봐야 한다. 맞을 걸.



12. 자라나던 의욕도 나뒹군다. 뭔가를 일궈볼까 말까 고민하며 기획안을 짰다.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다졌다. 최면 같은 마법을 자신에게 부리며 '나는 편집장이다'를 되뇌었다. 한데, 이게 뭔가. 오늘 들은 말은 그간 쌓인 피로에 불씨를 제공해 인내를 거대한 폭약고로 만들었다. 펑. 마음속으로 수십 번 불꽃을 만든다.



13. 임금체불. 그렇다. 피해야 할 회사 1순위이며 내 취업사의 초창기에 겪었던 그 기억을 이곳에서 되살리려 한다. 퇴사를 앞둔 직원이 귀띔해줬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망설였다고. 시기가 어쨌든 과정이 어쨌든 그저 고맙다. 감사, 감사, 압도적 감사. 개미굴에 빠지던 발을 슬그머니 걷어냈다. 그런 하루였다.



14. 쓴다. 그간의 소감을 이곳에 쓴다.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겪은 대로 보(이)는 법이다. 느낌과 시각이 묘하게 일치한다. 동일한 방향성으로 앞길을 가늠한다. 어디가 남쪽인지 알 수 없지만 가던 방향이 북쪽인 건 확실히 알겠다. 빛 드는 곳으로 머리를 두라던 선조들의 옛말을 떠올려 본다. 후.



15. 짜증 난다. 어지간하면 참고 다니려고 했는데 왜 하필 체불이란 말인가. 다시 글 쓰는 직업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어쭙잖은 회사나마 언론사 명패를 내걸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가. 이름 석자 내걸고 기사 쓰는 생활을 거부할 수 없는가. 쭈굴쭈굴하다. 기분이 아주.



16. 마감 있는 생활에서 오는 압박. 고향에서 올라온 엄마를 방에 모셔놓고 주말에 기사 마감하며 크로스체킹 하던 날들. 낯선 이들에게 살가운 감정을 내어주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으로 친구조차 만나기를 꺼려하던 시간으로 돌아가는 걸까. 보도자료는 다시 내 것이 되나. 어휴, 아주.



17. 상상만으로 밤고구마 먹다가 찐빵 먹고 호빵 데우는 기분이다만 이마저 지금 같은 환경이면 어떻게 요령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잠시 해 보면서 한 문장으로 문단을 구성하는 우매함에 했던 잘못을 반복하려는 자신을 꾸짖는다.



18. 아무튼, 내 이력서가 어디 있더라.









추신.이 회사 탓에 다른 회사 면접 기회를 포기한 게 생각났다. ㅂㄷㅂ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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