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에 공깃밥 있습니다.
밥심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모두가 젖은 날. 신발을 화로 옆에 뒀더니 조금 녹았다. 그런 것이 사소할 정도로 힘든 날이었다. 비는 밤까지 계속 내렸다. 긴 하루였다. /Ricoh GR3 @Spain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이다. 얼마 걷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우비가 눌어붙어 빗방울을 그대로 맞았다. 방수 기능이 있는 신발도 역할을 잃었다. 허벅지까지 물기가 올라왔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몇 시간에 걸쳐 비를 맞은 결과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조금 쉬려고 했다. 이때가 오전 11시쯤이다. 안타깝게도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었다. 홀딱 젖은 채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더 가야 할지 고민했다. 발바닥은 욕탕에 담가놓은 쭈그렁덩이였다.
그만 가자. 아니, 더 이상 갈 수도 없었다. 다음 마을은 8km 뒤에 나왔다. 이 상태로 8km는 무리였다. 무엇보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했다. 추웠고, 발이 쓸렸다. 가을 비는 그렇게 사람의 의지를 꺾었다. 위험했다.
숙소를 찾았다. 작은 마을이었다. 알베르게가 3개쯤 있는 듯했다. 첫 번째 알베르게는 다음 주까지 운영을 안 했다. 두 번째는 봄이 돼야 문을 열었다. 남은 숙소는 하나, 이곳마저 운영을 안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입술에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죽으란 법은 없는 걸까. 마지막 알베르게는 다행히 운영 중이었다. 문제는 오픈 시간까지 1시간 30분이 남았다는 점이었다. 비를 조금 더 맞으면 쓰러질지도 몰랐다. 어느 가정집 입구에서 비를 피했다. 어지러웠다. 숨이 가빠지고 손이 저렸다. 말로만 듣던 저체온증인 듯했다.
가만히 있으니까 더 추웠다. 그래서 다시 걸었다. 손이 저려 스틱을 들고 다녔다.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결국 문을 연 레스토랑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쫓겨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웬일.
라면 + 공기밥 있습니다.
한국어로 된 메뉴판이 있었다. "이런 미친..." 나도 모르게 쇳소리가 터졌다. 너무 힘들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힘들 때 라면을 만났다. 한국을 떠난 지 2주가 넘었다. 맨날 바게트에 레디 밀, 과일만 먹다가 라면에 공깃밥을 만났는데 하필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울컥했다.
팬티까지 젖은 채로 의자에 앉아 음식을 기다렸다. 고개를 숙인 채 양팔로 머리를 받치고 "와... 와..." 혼자서 뇌까렸다. 그러다 신라면 냄새를 맡고 고개를 들었다. 신라면이었다. 인간이 정말 사소한 것에 힘을 얻는다는 걸 이날 배웠다. 그릇을 핥았다.
주인이 "어떠냐"고 물었다. 'good'이라고 하려다가 'awesome'이 튀어나왔다. 몸 상태가 조금만 괜찮았다면 'best chef'까지 나올 뻔했다. 눈물을 글썽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라면을 팔게 된 이유를 물어보니 옛날에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 중 한국인이 있었단다. 메뉴도 그 사람이 써줬다고. 그 덕에 한 고비 넘겼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감사하다.
여담이지만 '볼(bowl)'보다 접시에 가까운 그릇에 라면을 담아줬다. 체력이 바닥을 치는 와중에 웃음이 터졌다. 내가 너무 깨끗하게 먹자 주인도 사뭇 놀란 눈치였다. 이래 놓고 저녁에 또 먹으러 갔다. 알베르게에 함께 묵게 된 한국인들에게 알려줬다. 저기 라면을 판다고. 셋이서 그렇게 밥을 먹고 저녁엔 와인을 마셨다. 젖은 옷가지를 말리며 화로 앞에 앉아 오랜만에 모국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힘든 하루를 그렇게 보상받았다. 죽은 듯 잠든 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