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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행선지는

왜 포르투였을까.

by OIM
Livraria Lello, Porto Portugal /Ricoh GR3 Ⓒ나한테있음

지금 생각해도 그럴싸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애초에 포르투는 계획에 없었다. 떠날 때 빈 손, 머리도 텅 빈 채였다. 돌아갈 직장이 없었고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뒤가 없는 사람은 일정에 관대하다. 나는 무계획이었다. 되는대로 걷자는 게 순례길행 모토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에 다음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걸었는데 어느 날 필립이 물었다. "순례길 끝나면 뭐 할 거?" "... 모르겠네. 딱히 계획 없는데?"


필립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10살 정도 어리며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 우리는 걷다가 친해졌다. 한동안 보폭을 맞추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포르투는 그와의 대화에서 나온 부산물이었다. 그는 다음 여행지로 포르투갈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깝고 육로로 이동할 수 있으며 리스본을 좋아한다고 그는 말했다. 포르투는 그 사이에 있는 경유지였다.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4시간 거리에 있었다. 순례자들의 단골 여행지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포르투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포르투를 시작으로 후보지를 추렸다. 모로코 사하라 사막도 순위권이었다. 모래사막의 밤은 고요 그 자체라고 했다. 영국도 가보고 싶었다. 런던에서 (가능하다면) 축구를 보고 커피숍 창밖으로 비 오는 영국 거리를 바라보려 했다. 스페인 발렌시아도 구미가 당겼다. 이강인의 경기를 직관하고 싶어서. 이런 가능성들을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그렸다. 하고픈 건 많은데 자본이 한정적인 상황. 대게 이럴 때 고민은 시작됐다.


후보지를 두고 저울질을 했다. 산티아고가 가까워질수록 이유를 붙였다. 모로코는 교통편(항공)과 높은 가격이 단점이었다. 런던도 항공편과 체류비를 감안해야 했다. 티켓 구하는 것도 일인 데다 저렴한 티켓은 위치가 안 좋다고. 스페인은 왔던 길을 돌아가야 했다. 축구 그 이상의 흥미도 없었다. 결국 남은 행선지는 미지의 땅 포르투갈이었다. 선택이 합리적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순례길행을 결정할 때 가장 멀리 했던 것이 합리성이란 것을 생각하면 포르투행은 단순히 기분에 따른 선택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포르투행 버스표를 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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