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떠나는 날이 왔다
아침이 밝자 현실감이 몰려왔다. 알베르게 한편에 보관하던 트레킹화의 흙먼지를 털었다. 사물함을 비우고 짐들을 배낭에 욱여넣었다. 산티아고엔 여느 날처럼 해가 떴는데 괜스레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그랬다. 산티아고를 떠난다는 건 순례길의 종말을 뜻했다. 결말을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의 맨 뒷장을 보는 듯했다. 한 달간 애정 바친 이 길에 떠밀리고 싶지 않았다. 더 걸을 길도, 예정도 없던 순례자의 마음은 우두커니 도시 끝단에 섰다. 떠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슬펐다. 길에서 느꼈던 희로애락도 지금부턴 옅어질 터다. 그게 싫었다. 불현듯 다가올 상실감이 두려웠다.
마지막 알베르게의 로비에 앉아 버스 시간을 기다렸다. 폰으로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짐들을 꾸려놓고 떠날 때를 기다리는데 지난 한 달이 꿈같아서 그냥 좀 울컥했다. 쓰임을 다한 스틱을 배낭에 꽂아두고 모든 것이 정돈된 짐들을 의자에 가지런히 정돈했다. 다리를 꼬으고 앉아 햇빛을 온몸으로 쬐었다. 그 앞으로 이제 막 산티아고에 입성한 순례자들이 걸음을 옮겼다. "부엔 까미노" "부엔 까미노" 내 필그림의 끝은 어울리지 않게 정갈했다. 그것밖에 알지 못했다. 마음껏 슬퍼하고 흐트러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 것을 그때는 왜 몰랐는지. 돌아보면 모든 게 그리움이고 모든 게 아쉬움인데 조금 더 솔직할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