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08

굳이 제목이 필요할까

by OIM

알쓸신잡 시즌2를 뒤늦게 보기 시작했다. 출연진이 교체돼서 그런지 지난 시즌보다 몰입하기 어려웠다. 1~2화를 넘기는데 애 좀 먹었다. 3화쯤에야 익숙해졌는데, 목포 편이 인상 깊었다. 특히 장동선 박사의 '갑각류 이야기', 인간은 가장 나약한 순간에 비로소 성장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야기였는데 비유가 적절했는지 크게 울렸다. 그렇게 울림통이 꿀렁거리는데 연타가 터졌다. 유시민이다.


유시민은 장 박사의 말을 받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이어갔다. '서민적 감각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김 전 대통령의 어록을 소개했다. 현실 정치인으로서 최고의 자질이라고도 첨언했다. 유 작가는 이런 철학 탓에 양측(만)을 각각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모진 비판을 받기도 했다며 그의 정치사를 회고했다. 멋진 말이었다.


감정선이 한 번 동조되기 시작하자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말마다 공감을 샀다. 이렇게 물렁하게 공감을 표한 적이 있나 싶다가도 마냥 프로그램이 좋아 멍하니 봤다. 전에는 직업 탓인지 뭐든 비판적으로 보다 보니 자기개발서나 갖은 수사에도 시큰둥했는데 공감이 되자 즐거웠다. 그러자 문득 공감능력이 발달한 이들은 보다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의문도 들었다. 그렇진 않겠지. 글귀를 적어둘까 했지만 왠지 그건 어색해서...




1. 출근을 앞두고 있다. 다음 주다. 오늘 전화를 받았다. 합격했단다. 예상치 않던 곳이다. 기분이 벙벙하다. 이유가 있다. 입사 시험을 망쳤다. '기사 쓰기'였다. 엉망진창으로 썼다. 오래간만에 쓴 기사다. 그 정도로 수습이 안됐다. 집에 오는 길에 다시 한번 봤다. 낯 뜨거웠다.


얕봤다. 작은 회사라 생각했다. '이 정도면' 같은 오만이다. 보도자료를 예상했다. 기사화시키지 않을까. 그런 생각. 예상은 빗나갔다. 회사에 대한 기사를 써보란다. 필요하면 대표가 인터뷰에 응해준다고. 30분간 인터뷰하고 기사를 썼다. 리드 뽑는데만 20분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40분을 추가로 썼다.


'시간이 없어서'라고 합리화하며 기사를 급 마무리했다. 제출하면서 보니 이게 무슨 글인가 싶었다. 내가 기사를 낳은 건지 호문쿨루스를 낳은 건지 몰랐다. 여긴 끝이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연락이 오더라도 이 정도 기사면 부끄러워서 못 갈 지경이었다. 심지어 면접 때 글을 잘 쓴다고 했으니. 그런데 합격했다.


이쯤에서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다른 면접자들은 어떤 기사를 썼나/못 쓴 기사로 연봉을 후려치려고 하는 걸까(=임금 수준에 맞는 사람을 뽑으려는 시도일까)/다른 합격자가 출근을 거부했나 등이다. 면접자가 여럿이었으니 나만이 대안은 아니었을 텐데 결과가 이렇다 보니 솔직히 혼란스럽다. 이게 뭘 의미할까.



2. (출근한다면) 기자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특정 산업에 초점을 맞춘 전문지이며 취재가 자유로워 보인다. 다만 자유로운 만큼 결과(기사)에 대해선 엄격할지도 모르겠다. 사진은 거의 쓸 일이 없으며 전문성을 쌓으면 칼럼니스트로 활동할 수 있다. 무엇보다 회사가 가깝다. 이 정도.



3. 지난주 발표 예정이던 회사에서 발표를 연기했다. 발표 당일까지 결론을 내지 못해 오늘 오후로 연기한다는 연락을 전해왔다. 이럴 경우 '나가리'일 확률이 높다. 내 강점이 다른 사람에 비해 우위를 점하지 않거나 엇비슷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발표 연기의 고려 대상이 내가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취재와 사진을 동시에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지속적이지 않은 경력과 상쇄돼 큰 장점으로 작용하지 않는 등 변수는 다양하다. 보수나 환경은 이쪽이 나아 보이나 포지션이 다르다. 확정된 곳은 평기자, 이곳은 팀장급. 하는 일은 비슷하겠지만.



4. 이로써 사진기자나 출판사 일은 접을까 한다. 뽑혀야 할 말이지만 지원 자체가 이번 주부터라 시기상 맞지 않기도 하고, 출판사는 글을 내거나 시험을 거쳐야 하는 등 입사 과정이 까다롭다. 심지어 위치도 파주라 차를 몰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회사 장비를 쓸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진기자보다 취재기자가 더 만족감이 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은 이렇게 흘러간다.



5. 어차피 이 나이에 게으르게 살기는 글렀다. 그런 느낌이 든다.



6. 일요일 밤-새벽이 내가 겪은 시간 중 가장 조용한 시간대가 아닌가 싶다. 층간소음도 그렇고 동네도 그렇다. 차도 사람도 모두가 야음에 묻히는 시간. 이 시간에 깨있다 보면 어둠이란 것도 눈처럼 내리는 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7. 필로티식 구조의 빌라에 살다 보니 주차를 1층에 하게 되는데, 내가 주로 대는 곳은 자리가 2개다. 옆자리에 대는 차도 지정석처럼 이곳에 대는데 종종 주차를 삐딱하게 해서 불만이 있었다. 며칠 전 또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대놨길래 내가 내릴 공간을 염두해 차를 벽 쪽에 붙이다가 사이드미러를 벽에 긁었다. 결론적으로 내 잘못이긴 한데 뭔가 기분이 나빴다. 왜 늘 피해는 배려하는 사람의 몫인가.



8. 하이 시에라로 올라탄 이후 맥북이 이상하다. 찾아보니 많이들 후회한다고. 특히 잠자기 모드로 들어간 이후 덮개를 열었을 때 화면이 먹통인 점과 초성 타이핑 오류 등 개선점이 많았다. 이 둘은 모두 최근 내 맥북에서 벌어지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게다가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배터리 소모도 빨라졌다. 사용기간이 비례한 건지 알 수 없으나 조치를 취하긴 해야겠다. 다운그레이드라도 하든지 원.



9. 한동안 내 문제점이 뭔지 생각한 적이 있다. 자기 컨설팅 같은 거다. 가짓수가 많아 나열해본다.


- 혼자 있는 시간에 컴퓨터를 켠다 = 컴퓨터 친화적 = 컴퓨터 중독

- 컴퓨터로 생산적인 일을 거의 안 한다 = 시간 효율이 떨어진다 = 생산성 바닥이다

-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 않는다 = 세우는데 만족감을 느끼나? = 위기의식 없다

- 할 일 하고 놀아야 하는데 놀기부터 한다 = 일을 미루다 급하게 처리한다 = 일의 질이 떨어진다(고질병)

- 책을 멀리 한다 = 안 읽는다 = 갈수록 멍청해진다

- 경제관념 떨어진다 = 텅장 내역 보면 안다 = 거지다

- 자제력 부족하다 = 군것질 + 커피 소비로 이어진다 = 과소비와 쾌락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강하다

- 글 못 쓴다 = 시간 주면 다 잘 쓴다 = 글로 밥벌이하려면 주어진 조건 내에서 잘 써야 한다. 나는...

- 게으르다 = 가능하면 눕는다 = 아무것도 안 된다


적어놓은 게 아니라 이 정도로 갈음하는데 종합하면 내 삶은 이렇게 정리된다.


집에 가면 컴퓨터를 켜는데 컴퓨터로 딱히 할 일은 없다. 고로 웹서핑이나 하며 논다. 이러다 보니 포토샵을 공부하거나 칼럼을 읽는 등 생산적인 일은 안 한다. 안 한지 오래다. 이런 습관은 내 성향과 관련이 깊다.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없어질 때까지 일을 미룬다. 마감시간이 없는 자기개발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니 계획이라도 세우는데 이것저것 적지만 달성(실행)률은 저조하다. 지키지 않는다고 지켜보며 탓할 사람도 없다. 자연히 위기의식도 없어졌다. 애초에 있었던가. 어쩌다 해야 하는 일은 마감시간을 앞두고 급하게 처리하는데 거의 만족하지 못한 상태로 결과물을 낸다. 빌어먹을 고질병이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든 '세 살 버릇 여든'이다. 따라서 실력도 떨어지고, 실력을 받쳐줄 책도 안 읽으니 낙하 속도에 가속이 붙는다. 이런 식으로 생활하니 노동 시간과 쉬는 기간이 '또이또이'를 이루고, 통장은 말 안 해도 거지 중 상거지. 주제에 버는 건 군것질과 커피로 소비하길 잘해서 '커피숍에 가면 공부를 하거나 글이라도 쓴다'는 합리화로 소비 성향을 심화한다. 먹으면 드러누워 자고. 이뭐병.


새해 버프를 받아서 변화의 계기를 만들고자 상태와 상황을 적었다. 나름 객관화한다고 한 건데 적고 나니 아프다. 오늘 기록한 게 훗날 변화의 계기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생채기를 내는 행위가 유의미하길 바란다.


가끔 만화 보면 그런 내용이 있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찾아와 패는 거다. "너 이 나 새끼..." 하면서. 결정적인 실수를 한 순간이나 방탕하게 산 과거를 찾는다. 나는 아마 작년, 그러니까 기자를 그만두고 고민하던 시기의 멱살을 잡을까나. 열정을 놓은 건 과정으로 본다지만 열정을 다해 나태한 시기는 할 말이 없다. 그마저 과정으로 보려면 결과가 좋아야 하는데 덕분에 올해부터 몇 배로 고달플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구제하는 일은 여러모로 숨 가쁠 듯하다.



10. 지난주부터 파스를 붙인 결과 허리는 다행히 완치를 앞두고 있다. 아마?



11. 한 때 경주마처럼 공부만 할 때 주머니에 믹스커피 4봉을 꽂고 다녔다. 스태인리스 컵 하나를 한 손에 덜렁덜렁 들고 다니며 나머지 손으로 책을 쥐었다. 졸리면 커피를 하나씩 타마시며 하루 4~5잔 정도 털었던 것 같다. 반 각성 상태로 하루 2~3시간씩 자던 때다. 그때처럼, 오상식 과장처럼 그렇게 지내보련다.



12. 계획은 구체적일수록 좋고 마음먹은 일은 빨리 실행할수록 좋다. 그런 면에서 실패는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겪어봐야 할 일이다. 자소서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실패'는 달리 말하며 '경험'이니까 자신이 소화하기 나름 아니겠나. 삶도 이와 같이.



13. 나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너무 오래 놀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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