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전야(出勤前夜)

당분이 필요했다

by OIM

내일부터 상용근로자로 돌아간다. 발버둥 치다시피 견뎌내던 이 겨울, 살얼음에 식은땀이 흐를 시기 운 좋게 구직에 성공한다. 무급 무대 보험을 제공하는 등따배불 백수에서 계약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언론노동자로 복귀한다. 작은 회사, 신생이 가진 디메리트는 감수하기로 했다. 글 쓸 판을 깔아주고 취재할 환경을 보장하는 곳만으로도 난세에 부려 볼만한 처세 아닌가. 기레기 소리 듣는 언론 바닥이나 취업난이 득세하는 춘추전국 같은 환경에 고정수입도 이만하면 됐다. 내일을 발판 삼아 언젠가 "c'est la vie" 말할 수 있기를.



KakaoTalk_Photo_2018-01-14-17-55-22_10.jpeg 기분 탓인지 동네 나무도 우중충해 보인다.


1. 어제오늘 사뭇 압박을 받았다. 압박을 주는 이 없는데 받는 사람은 있으니 희한한 일이다. 출근을 앞둔 탓이다. 놀다가 출근할 때의 거북함은 몇 가지 상황과 비교된다. 대표적으로 휴가 복귀를 앞둔 군인의 심정이나 휴가를 다녀온 직장인의 마음과 비슷하겠다. '아, 가기 싫다'라고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안 갈 수 없는 상황과, 상황을 알면서도 가고 싶지 않은 천덕꾸러기 같은 마음이 한편에 공존한다. 그래서 어제는 최대한 남은 시간을 늘어뜨리고자 늦게까지 깨있으려 했으나 초저녁에 맥주 한 잔 했더니 눈꺼풀에 누군가 올라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1시 30분. 이불속에 들어와 전기장판까지 켰더라. 분명히 소파 앞에서 졸고 있었건만 이 무슨 귀소본능일까. 요즘 맨날 누워서 뒹굴어서 그런가 보다. 무릎 담요는 또 왜 두르고 잤는지.



2. 하루 종일 뒹굴고 쉬다가 지는 해가 다시 뜰 때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쓸 데 없는 사실에 번뜩 위기감을 느껴 스타벅스로 기어 나왔다. 만만한 게 연희 DT. 단 거 먹자, 단 거 먹자 뇌까리며 인터넷을 뒤지다가 바닐라 크림 프라푸치노를 찾았다. 가격은 라테 급인데 프라푸치노다. 음료가 온통 희다. 크림을 올리면 흰둥산이 된다. 바닐라 셰이크의 밍밍한 버전이라고도 하던데 적당히 달다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주문하니 이런 게 나왔다.


KakaoTalk_Photo_2018-01-14-17-55-23_92.jpeg 스타벅스 바닐라 크림 프라푸치노.


이미지가 우유우유 한데 맛도 그러하다. 커피 맛은 없다. 드리즐이나 시럽을 추가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 뭔가 스타벅스에서 하얀 음료를 먹는 묘한 기분도 있었고, 일단 맛있다. 바닐라 셰이크를 적당한 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살짝 싱거울 수 있다.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한 음료.


P.S. 메뉴판에 없다.



3. 일요일 오후 6시 스타벅스 연희 DT에 자리가 거의 없다. 애매하게 붙어있는 테이블을 이용하거나 위치상 절묘하게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다는 느낌을 주는 자리를 이용해야 했다. 하마터면 음료 들고 다시 집에 갈 뻔했는데 운 좋게 퇴식구(?)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곳을 마지막으로 내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온 사람은 다시 1층으로 내려갔는데 어쩌면 집에 갔을 지도. 글을 쓰거나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카페에 나오는지라 자리가 없으면 곤란하다.


KakaoTalk_Photo_2018-01-14-17-55-30_80.jpeg 이거 완전 스벅빠 아니냐.



4. 요즘 <우리 음식의 언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쓴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언어의 다양한 변천사가 기록돼 있는데 '밥'은 지역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밥으로 표기했단다. 대표적으로 부추만 해도 부자, 정구지 등 지역마다 부르는 방법이 달랐는데 밥은 한 번도 밥이 아닌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다 못해 '힘'만 해도 밥 뒤에 붙어 밥'심'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밥은 밥이다. 적다 보니 당연한 걸 신기해하는 듯해 멋쩍다. 다 읽고 내용을 적어보기로 하자. 이번 주 안에 독파 예약.


도서관에서 <아날로그의 반격>이 몇 달째 대출 중이라 대신 고른 책.



5. 오랜만에 업계 종사자들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초밥 뷔페에서 밥을 먹고 소금 커피를 먹으며 전 회사 이야기, 주변 사람들, 지금 회사, 언론계 등 다양한 화두를 공유했다. 사실 말이 좋아 '업계 종사자'지 그냥 친구에 가깝다 보니 자연스레 사석에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오갔다. 하지만 역시나 이 바닥에 너무 오래 있었는지 생활 대부분이 업계와 관련된 이야기다. 어떤 사건을 취재 중이라거나 현장에서 요즘 a, b, c매체 사람들을 주로 만난다는 이야기. 공통으로 아는 기자의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모 매체 내부가 어쩌니, 어떤 선배는 어떻게 지낸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그런. 그러고 보면 이 모임(?)도 제법 오래됐다. 아직도 살갑게 연락을 취하는 걸 보면 특별히 모난 이가 없어서일지도?


KakaoTalk_Photo_2018-01-14-17-55-28_8.jpeg 강남역 <브라운홀릭>이란 카페의 소금커피(hot). 카페가 유명세를 타기 전 차갑게 먹은 적이 있는데 '니맛내맛'이었다. 따뜻하게 먹는 걸 추천.



6. 이날 만난 친구 한 명과는 조금 특별한 사연이 있는데 생각하면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이 친구와는 몇 년 전 모 방송사 공채 대비 스터디를 함께 꾸린 적이 있다. 우리가 주축이 돼 사람을 모집했으나 구성원을 채우는데 애를 먹었다. 한 번은 제한 없이 스터디원을 모집했더니 글을 거의 써보지 않은 사람이 들어와 모임이 애매해졌다. 또 한 번은 서로 간의 첨삭 기준이 달라 상대의 첨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성원도 생겼다. 당시는 지원 분야가 다른 탓으로 이해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3명의 고정멤버가 생겼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짧게는 1~2주, 길게는 한 달 정도를 함께 하고 헤어졌다. 그 결과 고정멤버 중 둘은 서탈, 한 명은 전형 중 탈락한 뒤 스터디는 와해된다. 그리고 이 셋은 몇 달 뒤 방송사, 통신사, 일간지에 PD와 기자로 각각 합격하는, 꽤 재미있는 우연을 만든다. 셋 중 둘은 심지어 경찰서 수습 돌다가 광진-혜화 라인의 모 경찰서 안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보고 거리 찾다가 "어?" "어??!" 하고 마주친다. 그중 한 명이 나다. 힘든데 반가운.



7. 아, 맞다. 내일부터 정장 입어야 하네. 기자가 웬 정장... 인가 싶지만 회사 규정이라니 할 수 없다. 95 사이즈 입을 때 샀던 정장을 100~105 사이즈 입는 지금 입는 일은 매번 도전 욕구를 부른다. 햐, 군살...



8. '데스크에서 틀 다 짜 놓고 논거 채워서(=취재/조사해서) (네 바이라인으로) 기사 내보내라'는 식으로만 지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포통장 빌려주는 사람들처럼 바이라인 빌려주는 글 공장 노동자는 슬픈데 아주.



9. 어쨌거나 글 쓰기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다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사회 현안이라든가 관련 쟁점을 파악하려면 기사 한두 개 읽는 걸론 부족하다. 때문에 꾸준히 흐름을 타 줄 필요성이 있는데, 예상했던 대로 하루 이틀 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하여 당분간 이른 아침 일어나 그날 신문 몇 개씩을 훑어보려 한다. ...생업이라 의지보단 의무에 가깝다고 봐야겠다. 내가 이전 회사에서 인간적으로 싫어했던 부장이 있는데 그 사람이 한 말 중 유일하게 수긍할만한 게 하나 있다. "어설프게 (취재)하면, (뒤) 통수 맞는다고." 요즘 같이 모두가 모두의 기사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시대에 현안을 어설프게 다루면 타사에 아이템만 던져주는 꼴이란 의미다. 당시 내가 갔던 현장에 대한 뉴스가 다음날 YTN에서 흘러나왔는데 소위 말하는 '야마'를 제대로 잡아 보도해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죽 쒀서 개준' 격, 그때의 교훈.



10. 연초에 허리 담 걸린 이후 오래 걷거나 피곤하면 허리가 뻐근하다. 척추 문제일까. 어릴 적 아버지가 주무시면서 내는 삶에 겨운 신음이 이런 배경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콧등이 시큰하다. 늦게 퇴근하거나 힘들어 보이는 날 어머니가 해준 부황을 떼고 난 뒤 홀로 침대에서 잠을 청하며 '아야아야아야'의 허밍 버전 같은 소리들을 내셨는데, 코흘리개 시절의 어린 나는 어머니 앞에서 그 소리를 흉내 내곤 했다. 멋 모르고 까부는 핏덩이를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지.


KakaoTalk_Photo_2018-01-14-17-55-18_82.jpeg 연희동.


11. 연희동 기온이 영하 14도까지 내려가며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더니 집안 보일러 온도가 27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출근 전 마지막 연휴 기간의 컨디션 관리를 명분 삼아 시간 주기로 불을 올렸더니 집안이 후끈하다. 한참 집을 비워도 들어오면 훈훈한 게 사람 사는 집 같다. 하지만 가스비는 사람 같지 않겠지.



12. 하이시에라로 올린 뒤 맥북을 덮었다가 열면 먹통인 경우가 빈번하다. 자꾸만 강제로 껐다 켜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알아보지 않고 갈아탄 걸 후회하고 있다. 시에라로 돌아가든지 해야지 원.



13.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자주 접하는 이에게 재범 위험이라든가 교화 가능성, 성격 등 누구나 궁금할 수 있지만 뻔한 대답을 예상할 만한 그런 질문들을 던졌다. 그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예측을 빗나가지 않는 부분도 있고 의외인 모습도 있었다. 개중 누구나 아는 인물도 있어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사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14. 근래 놀면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많이 돌아다녀서 최저임금 인상이 이 정부 지지율을 무너뜨리는 뇌관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커뮤니티 특성상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이 모이는 경향이 있어 그런 의견이 집중돼 보일 뿐이었다. 조국 민정수석이 발표한 검경 수사권 조정, 또 문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 등으로 도마에 오른 실무 외교, 대북 정책 방향, 국정원의 제도권 내 (부분) 편입 등 최저임금 건이 아니라도 뇌관이 될만한 사안은 차고 넘친다. 문제는 이 정부가 각 사안을 풀어나가는 방안에 있는데 색이 다른 지난 정권들만 하더라도 10년 가까운 시간을 집권한 탓에 문 정부의 정책들은 어떤 의미에서 국민들에게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방향성이 옳다고 해도 익숙한 것을 배제하는 일은 필요 이상의 노력을 요한다. 각양각색의 5천만 국민을 상대로 설득해 나가야 하는 정부의 면모는 이제부터일 터다. 3권 분립 국가 특성상 행정부 수반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내어줘야 하는 것도 있을 테고 정치적 이해관계도 끊임없이 고려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며 지향점으로 나아가는 일은 드라마와 같을지라, 문 정부 내각을 구성하는 개별 에피소드의 주인공(실무진)들 능력을 극적으로 감상할 수 있겠다.



15. 언론 지형도 흥미롭다. 자세 말이다. 정부 성향에 따라 정권과 각 세우는 언론사야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 왔다지만 요즘 특정 언론은 노골적으로 정부를 칭찬하는 경향이 있다는 후문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정부의 앞길이 순탄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알다시피 뉴스를 볼 수 있는 인프라가 대형 포털 위주로 돌아가고 있는데 매체 수가 워낙 많을뿐더러 대형사를 제외하면 영세 매체들은 광고에 따라 논조가 변할 가능성도 있어 여러모로 정책 펴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예를 들어 며칠 전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답변을 야마로 잡은 한 경기지역 일간지의 기사 제목이 이렇다. [속보]문재인 대통령 "2기 내각 구성, 아무 생각 없다" 이걸 속보 처리한 데스크의 판단과 제목을 뽑은 편집기자든 데스크든 그 누구의 선택이 놀랍다. 심지어 기사엔 내용이 없다. 말 그대로 '속보'인 셈인데 발언의 함의를 생각하면 오독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말 그대로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면 이 기사를 다룬 기자가 얼마나 나태한지 보여주는 셈이다.


반면 동시간대 이를 보도한 타사의 제목을 살펴보자. 속보 처리한 것도 같고 기사 내용도 없어 형식마저 같다. 이렇게 제목을 뽑았다. 문재인 대통령 "2기 내각, 아직 생각 없어" (속보) 비슷한 말 같지만 두 제목 간 의미는 상당한 거리를 가진다. 언론이 객관성을 담보로 보도에 신뢰를 더하려고 하지만 인간이 하는 일인 이상 어휘의 취사선택이나 내용 구성 등에 모든 의도가 포함된다. 제목도 마찬가지다. 전자를 통해 대통령의 능력이나 성격을 의심할 수 있지만 후자는 시기의 문제로 상황을 해석한다. 모든 게 드라마, 모두가 주인공. 그런 시기다.



16. 아참, 합격한 회사 중 급여가 의심스럽던 한 곳은 확인 결과 실수령 기준 약 160만 원에서 올라가는 구조라고 해서 생활이 어려워 가지 않겠다고 밝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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