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자세

시간이 아프다

by OIM

주말을 이용해 고향에 다녀왔다. 외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게 남은 유일한 '할머니'이며 동시간대를 가장 오래 공유한 분이다. 늘 시크한 태도로 손자들을 대하면서 그 속에 애정을 담았다. 어릴 적 한창 까불고 다닐 때 오죽하면 외할머니가 "내 딸 좀 그만 괴롭혀라"라는 말을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오기로 엄마 말을 더 안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랑받고 자라던 꼬마에게 유일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외할머니는 그래서 내게 조금은 어려웠다.


머리가 굵어지고 자란다는 걸 실감하던 시기의 일이다. 외할머니가 부쩍 작아지셨다. 모든 어른들이 어릴 때만큼 커 보이지 않던 그런 때다. 오랜만에 뵙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어딘지 왜소해 보였다. 표정이나 태도는 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변해버린 모습(느낌)이 낯설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게 내 것이 아니란 점에서 슬펐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늙고 계셨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연락을 받고 내려갔을 땐 이미 장례식장 사진으로 외할아버지를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라서 학교에 들어가 시험을 치던 시기부터 조금씩 몸이 안 좋아지셨던 외할아버지는 한참을 누워계시다가 가셨다. 팔순을 훌쩍 넘긴 연세로 돌아가셨기에 '호상'이란 말도 나왔다. 그러나 좋은 죽음이란 말은 피붙이에게 다소 잔인하다. 누군가는 그렇게 받아들이더라도 그 말이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아팠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쩍 힘을 잃었다. 머리도 새하얗게 셌다. 작고 힘없는 외할머니가 안돼 보였다. 외할머니는 외삼촌네나 엄마가 함께 지내기를 권유했지만 한사코 거부하셨단다. 외할아버지와 살던 시골에서 홀로 지내며 할 수 있는 일을 하셨다고. 자식들에게 폐 끼치기 꺼려하시는 외할머니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렇게 홀로 지내신 지 어느덧 1~2년쯤 됐을까. 외할머니가 편찮으시다. "호야, 너거 엄마 좀 괴롭히지 마라 이놈 손아"라며 밭일로 거칠어진 손을 외손자의 등에 대고 토닥이던 기억이 바위만큼 무겁다.


기껏해야 명절 때나 찾아뵀던 외할머니는 종종 엄마를 통해 우리 소식을 물으셨다 한다. 대학 때는 취업 잘 돼라고, 취업 후엔 장가가야 할 텐데 라며 매년 매분기 걱정하셨단다. 수년에 걸친 소식들을 그때는 그저 흘려 넘기다가 이제야 응어리져 마음에 자리한다. 내가 사리분별을 하기 시작한 뒤 내 곁을 떠났던 분들처럼 외할머니도 갑자기 안녕을 고할까 봐 걱정이 텅 빈 마음을 가득 메웠다. 누나가 아침에 외할머니와 통화했다며 힘들어하시더란 말을 전했을 땐 심장이 내려앉았다. 지난 슬픔들이 오버랩됐다. 자꾸만 그랬다.


외할머니는 가느다란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고 계셨다. 괜찮은 척 웃었지만 호흡을 힘들어하셨다. 그나마 많이 나아진 상태라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병원에서는 폐 기능이 갈수록 저하된다고 했단다. 그래서 폐렴이 악화되면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에게, 누나에게 각각 듣다 보니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그 정도 막연함이 불안을 거머쥔다. 식사시간에 밥을 거의 남기다시피 한 외할머니는 식사가 끝나자 마스크를 쓰셨다. 입을 막은 마스크 탓인지 거친 호흡을 몰아 쉬셨다. 아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눈물이 났을지도.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양로원에 보내달라 하셨단다. 여생을 자식들에게 짐 지우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시는 모습이 짠하다. '짠하다'는 정도로 대체할 감정이 아니지만 어떤 단어가 적합한지 모르겠다. 너무 슬프면 정도를 표현할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걸 몇 번의 죽음을 통해 깨달았다. 매번 글을 쓰려고 했지만 슬픔을 담을 그릇을 만들 수 없었다. 진정성이란 말도 그저 수사적 표현에 불과했다. 주저앉아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가까운 이의 부재는 모든 것을 허물었다. 쓰나미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갑자기 누군가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의 슬픔과 달리 내 애정 어린 사람과의 이별 앞에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다가오는 슬픔을 손 놓은 채 바라보는 심정은 단순한 무력감 이상이다. 먼 옛날 외가에서 소여물을 가지고 놀다가 외할머니가 쪄주신 옥수수를 먹으러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고사리 손으로 외할머니를 따라가서 벼를 베기도 했다. 주는 음식 받아먹고 도움도 안 되던 벼베기를 했던 기억이 지금처럼 큰 의미로 다가오던 때가 없다. 이 모든 게 슬픔의 매개가 된다고 생각하니 얼만큼의 눈물을 준비해야 할지 상상이 안된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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