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 않다.

너와 나의 기준

by OIM


성폭력이란 거 아주 더러운 일이다. 당하는 입장은 말할 것도 없고 '방관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방관자는 말릴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 적기를 놓치면 공범이 된다. 생계나 안위를 놓고 고민하는 것마저 죄악이 된다. 뉴스에 나온 최영미 시인의 '괴물'처럼 그 자리에서 "이 교활한 늙은이야"라고 외치려면 많은 것을 담보해야 한다. 각계각층에서 쏟아지는 성폭력 관련 뉴스로 성범죄에 무뎌진 사회의 민감도를 가늠할 수 있다. 한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해 못할 상황들이 특정 분야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하나의 뒤틀린 현상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이 현상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술'과 '강제력'이 동원된 행사에는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공명 현상 같은 거다. 미디어에 조명되는 강간이나 유사성행위까지 가지 않더라도 허리를 감싸거나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행위 등은 이성 친구들 중에 적어도 한 명 이상은 당했을 준범죄다. 원하지 않는 상대와 원하지 않는 술을 먹는데 원할 리 없는 짓까지 당한 것을 생각하면 죄질은 훨씬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왜 그러는 걸까.


우선 암묵적인 분위기가 한몫할 테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고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으레 그런 행위를 했을 때 감내하고 넘긴 피해자들을 겪어온 가해자는 비슷한 환경이 조성되면 습관처럼 저지르는 거다. 흡연자가 극장 안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행위는 명확한 잘못으로 규정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다. 그런 상식선 위에 이를 시도하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술자리 성추행은 법과 도덕의 느슨한 경계 위에 관행이란 발판을 딛고 우뚝 솟아있다. 규제 주체와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누가 퇴근 후 정신을 놓아버린 상대의 손과 혀를 쳐낼 것인가.


경쟁사회에서의 생존 문제도 주목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내부고발자를 일종의 부적응자로 응대하는 경향이 있다. 내부고발이 도덕적으로 바른 행위라는 인식을 심어주더라도 내부고발을 한 사람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군이나 기업의 내부고발자들이 고발 이후 겪는 고초를 사회는 책임져주지 않는다. 명분이나 허울이 타인의 삶을 보호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정의'를 세울 제물로써 그들은 소모되어 왔다. 그들을 통해 정의를 위로받은 대중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뿐이다. 단말마일지도 모르는 고발자들의 외침은 일상의 카타르시스가 되어 사라져 간다. 잃은 것 없이 세운 정의의 기한은 딱 그 정도.


'이율배반'이 먹혀드는 사회적 구조는 또 어떤가. 잘못된 건 알지만 너네는 깨끗하냐는 외침 아래 상황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흘러가버린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이놈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서 행해지는 성폭력은 '적반하장' 또는 '안하무인' 아래 시류를 이긴다.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언제부터 권위에 대항하는 터부가 되어버렸나. 피해자는 상처를 안고, 방조자는 죄책감을 안고, 가해자는 찝찝함을 안고 저마다의 길로 돌아선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고질적인 인식은 이제야말로 바뀌어야 할 악습 중 악습이다.


"침묵하지 마라" 이 말은 무책임하다. "나서라" 이 말도 무책임하다. "함께 하자" 이 말도 무책임하다. 너와 나의 생각과 환경은 저마다의 가치를 등에 업었다. 누군가에게 행동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거대한 명분으로 정의를 세우자는 공허한 외침은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을 다시 한번 상처 입힌다. 나서려면 자신이 나서면 된다. 그렇게 핏대 세우고 소리 높여 세간의 관심을 끌면, 그래서 피해자가 용기를 내면, 그때 다가오는 손을 잡아주면 된다. "너는 왜 침묵하냐"는 질책은 피해자를 옥죄는 사회적 시선과 무엇이 다른가. 자신의 '선'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일은 비겁하다.


용기를 낸다는 건 구체적 행위다. 피 흘릴 각오 위에 세우는 주춧돌 같은 거고 상실을 예언한 선지자의 일 보와 같다. 누군가의 잘못을 공개하는 것을 이만큼 어려운 일로 만들어버린 사회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믿고 달리는 열차 같아서 그 속에 탄 우리는 각자가 불편하지 않은 길에 안착한 광신도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스스로 '이 정도'라고 생각하는 기준선을 세워 자신의 도덕과 법에 되물어야 한다. 너와 우리, 사회가 아니라 '내'가 용납하는 인간다움이란 어디로 수렴하고 있는 것인지. 술과 지위 아래 떨어지는 숱한 피해자의 인권 앞에 관용이란 얼마나 허울 좋은 말인가. 우리는 조금 더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 성폭력에 단호할 필요가 있다. 성폭력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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