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영화x혼영, 콜라보
맑다. 모처럼 하늘에서 햇살이 내린다. 한동안 내린 비로 축축해진 감정에 온기가 돈다. 빗소리 대신 새소리도 들린다. 오늘이 평일만 아니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열린 문으로 밖을 본다. 희미하게 바람이 분다. 볼 수 없는데 느낄 수 있다. 며칠간 잠재웠던 오감이 회사에서 살아난다. 바람이 분다. 그런 봄이다.
1. 연휴가 끝났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다. 어젯밤 잠들기 전엔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4일간 내리 쉰 여파는 마지막 날 그렇게 찾아왔다. 아침에는 알람을 4번이나 껐다. 6시 50분부터 9분 간격으로 자다가 깼다. 일찍 나가겠다는 다짐은 꿈속에 접어두고 오늘도 급하게 집을 나섰다. 평일에만 누릴 수 있는 효과겠거니 했다. 여전히 반쯤 감긴 눈으로 버스를 탔다. 출근길이 붐볐다. 현실감이 몰려왔다.
2. 아쉬움이 큰 만큼 연휴는 좋았다. 이건 그때의 이야기다. 월요일 밤 12시 30분, 그러니까 화요일 오전 12시 30분이다. 신촌 메가박스에서 <버닝>을 봤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다. 유아인과 스티브 연이라는 생소한 조합에 이창동을 끼얹으면 어떤 이야기나 나오나 궁금했다. 영화를 예매하고 한동안 호기심과 게으름이 내면에서 다퉜다. 그럼에도 밤 12시에 팝콘과 커피를 산 걸 보면 게으름이란 것도 실상 별 볼 일 없는 놈이구나 싶다. 심야영화는 즐거웠다.
3.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유아인과 스티브 연의 연기는 인상적이었으나 감독의 메시지는 난해했다. 애초에 '메시지'란 게 있나 싶을 정도로 영화는 관객에게 직감적으로 다가온다. 인물 사이의 묘한 긴장과 어색한 상황이 가져다주는 불편함, 배우들이 선사하는 몰입은 말 그대로 '뭔가'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거듭 영화를 보면서 되새기면 정작 영화 자체를 즐기는데 방해가 될 수 있으니 한 번쯤 그냥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4. 나는 몇 가지 부분에서 실수했다. 온전히 영화에 빠지는데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 △이창동 감독 △대사에 내포된 레토릭 △인물의 노골적인 감정선 등을 이유로 분명 '읽을 수 있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영화 내내 유아인의 감정이, 스티브 연의 표정이, 전종서의 대사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하려고 진을 뺐다. 이 시도는 자칫 영화의 흐름을 놓칠 위험을 가져오기도 했다.
5. 영화의 음향은 인상적이다. 장황한 설명이나 논리 없이 관객에게 다가서는 방식을 차용한 이창동 감독의 의도를 돋보이게 해준다. 특히나 극 중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나 상황이 주는 긴장감 등을 관객이 공유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런 면에서 간간이 모노드라마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이야기의 완급 조절을 하거나 인물의 비중을 살짝만 건드리면 이야기는 또 다른 형태를 띨지도 모른다. 감독은 유아인의 독주 속에 스티브 연을 나란히 세워 서로를 타자화 한다.
6. 영화의 몰입을 막는 요소가 두 가지 더 있었다. 언론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아는 인물이 카메오로 등장한다. 갑자기 등장하는 게 아니라 '닮았는데?' 싶다가 '설마' 한 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식으로 화면에 나타난다. 혼자 빵 터져서 속으로 꺽꺽 대며 웃었다. 두 번째는 내 뒤에 앉은 커플 중 여자분이 감탄사를 '내질러' 댔다. 다소 민망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어우~"라든가 "eww~"를 소리내 뱉었다. 이럴까 봐 일부러 심야를 선택했는데….
7. 영화에서 살짝 '홍상수' 색감을 맛봤다. 유아인과 스티브 연은 캐릭터 그 자체로 훌륭했다. 전종서는 연기자가 연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김민희 같은 배우가 '해미' 역을 맡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일상을 연기하는 김민희 특유의 색을 띤 그런 배우 말이다. 김민희는 아닌데 김민희 같은, 그런 느낌. 일상을 배경으로 한 서사에서 연기자의 색채는 어쩐지 독소였다.
8. '배드신'이라거나 노출신 이야기를 얼핏 본 듯하다. 기사에서 접한 기억이 난다. 전종서가 신인인데 배드신 어쩌고 같은 내용이었던 것 같다. 영화에 나온다. 그러나 야하지 않다. 이야기에 필요한 정도의 노출에 그친다. 배드신을 연출하는 장면에서도 애틋한 감정이나 야릇한 분위기가 없다. 관객에 따라 다소 무미건조하게 느낄 수 있는 장면은 또 어떤 의미에서 대담하다. 이게 '이창동식'인가 싶다.
9. 원작을 보고 영화를 보라는 말이 있다. 오히려 영화를 본 뒤 원작을 봐야겠다는 이야기도 웹에서 접했다. 나는 후자 쪽이다. 책을 찾아보며 문득 비교대상이 뚜렷한 것을 만든다는 건 창작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기자들의 평도 나뉜다. 6점부터 10점까지 다양했다. 취향을 탄다는 의미일 테다. 일관되게 좋은 평을 받는 작품보다 이런 작품이 더 호기심을 자극한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지 않았지만 흥미로웠다.
10. 영화를 본 뒤 해석이 나와있는 기사를 찾아보면 그제야 재밌다. 그러니까 뒤늦게 재미를 잡을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는 거다. 서사구조나 레토릭의 의미, 이창동 감독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배경 등 영화를 볼 때보다 좀 더 풍성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와, 이거 진짜 재밌다'며 친구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볼만한 영화를 묻는 질문에 선뜻 답해줄 순 있을 법하다. 괜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이기도 하고.
11. 스포 될까 봐 내용 이야기는 하나도 못 적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