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하는 루트도 다양하다
1. 여러모로 생각할 게 있어 스타벅스에 왔다가 커피만 마시고 가게 생겼다. 앞날이라든가 계획이라든가 펜을 쥐고 할 일이 이제야 생각났다. 바닐라 크림 콜드브루 라테를 마시면서 '맛있다' 거린지 한 시간여. 뭐 했나 나는.
2. 빨대를 물고 멍 때린 이유는 카운터에 있다. 주문을 받는 분이 놀라운 사실을 갑자기 알려주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늘 먹는 콜드브루 라테를 시켰는데 단종됐단다. 이건 마치 "라테 주세요" 했는데 "이제 우유 안 나와요"라든가 "초콜릿바나나 주세요" 했는데 "바나나 수입이 안 돼서..."라는 대답을 들은 격이다. 콜드브루는 되는데 콜드브루 라테는 단종됐다니. 라테는 되는데 콜드브루 라테는 안 된다니. 왜.
3. 그렇게 받은 충격으로 한참 놀다가 이제 글 쓴다. 좀 더 여유 있게 쓰고 싶었지만 오늘은 실패다. 어쩌겠나. 매 순간이 실패의 조각조각으로 구성된 것을. 크게 보면 오늘 하루도 실패다. 그래도 길게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될 테니 낙담할 필요는 전혀 없다.
4. 진정한 낙담은 오늘 아침에 했다. 연희동에서 신촌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20분째 연희동을 못 벗어났다. 그러니까 연희동에서 서대문우체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버스가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운 좋으면 10분에도 가는 거리를 50분 걸려 도착했다. 걸어가도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뻐킹 연희동.
5. 강남에 있는 회사에 9시까지 출근인데, 신촌역 도착 시간이 8시 45분이다. 식은땀에 불쾌감이 배어 나왔다. 이 같은 상황은 도로 상황이 주는 불확실성에서 비롯됐는데, 매번 (대체로) 편리하고 (상대적으로) 일찍 도착하는 교통수단을 두고 걸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6. 지하철을 타면 항상 붐빈다. 출퇴근 시간이 그렇다. 요즘 들어 얇은 바지를 입는다. 여름용이다. 옷 위로 전해지는 촉감이 상당히 발달하는 계절이다. 손잡이를 잡고 서면 엉덩이로 타인의 가방이 닿는다. 여자분들의 키를 고려하면 대체로 이들의 백팩은 내 엉덩이에 닿는다. 놀란다. 움찔. 상대방은 모른다. 곤란하다.
7. 진짜 곤란한 상황은 이다음이다. 전철의 진동에 따라 상대방의 가방이 엉덩이 터치를 반복한다. 미묘하다. 그 희한한 감각은 피할 수도 없다. 간혹 스치기라도 하면 소름이 돋는다. 여전히 상대는 모른다. 요즘 매일 반복되는 이 상황에 내 심장이 벌렁댄다. 이런 것에 놀라는 내가 우습다.
8. 친구의 추천으로 <나의 아저씨>를 보기 시작했다. 몇 편 안 봤는데 재밌다. 캐릭터가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선균의 연기도 훌륭하다. <연애시대> 감우성 이후로 이런 캐릭터는 오랜만인 듯하다. 아이유의 연기는 의외다. 이들의 케미가 맞을 줄 몰랐다. 심지어 노래도 좋다. 웰메이드다.
9. 한동안 게으름을 피웠더니 다이어리가 죽어있다. 반대로 부지런을 떨던 때의 다이어리는 계획 따위로 빽빽하다. 깨끗한 다이어리는 매력이 없다. 다시 다이어리를 살려본다. 동시에 운동도 한참 쉬었다. 몸이 불었다. 근육인지 살인지 애매하다. 확실한 건 100 사이즈 와이셔츠가 작다. 광배와 어깻죽지가 끼인다. 아예 몸을 키우자 싶다.
10. 다시 시작이다. 오늘 전신의 근육을 '조진'다. 바짝 쪼인다. 아마 아침에 좀비처럼 깰 테다. 그래도 괜찮다. 내일은 금요일이다. 묵혀뒀던 <자기 앞의 생>을 다 읽는 날이자 다시 근육으로 몸집이 비대해지는 첫날이기도 하다. 주문했던 보충제도 왔겠다, 쥐어짜고 오자. 쓸 말이 많았는데 이만 줄인다. 의욕은 있을 때 써야 하는 법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