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와 도우미와 대학생

"당신이 옳아요"

by OIM
한동안 방울토마토와 바나나만 먹었더니 살이 1kg 빠졌다.











'CU' 앞 대로가에 차를 세운 택시기사가 차 옆에 서서 빵을 먹는다. 봉지째 손에 쥐고 뜯어먹는 식이다. 패스츄리에 설탕이 묻은 그런 빵이다. 우유는 보이지 않는다. 택시의 비상 깜빡이가 주기적으로 깜빡인다.


같은 시각 편의점 옆 노래방으로 여자 두 명이 들어간다. 짙은 화장과 갖춰 입은 옷이 돋보인다. 승합차에서 내려 곧장 지하로 난 노래방 입구에 들어선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승합차는 여자 두 명을 더 내려준 뒤 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다.


인근 GS25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라면을 먹거나 먹거리를 사서 집으로 향한다. 돌핀 팬츠를 입은 여자와 동년배 남자는 운동복을 입고 들어왔다. 둘은 물건을 고른다. 영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나지막이 읊조린다. “헤비한 건 별론데...”


오전 1시 30분. 삶이란 게 길 위에 흩뿌린 압정처럼 반짝인다. 우리는 해가 진 풍경에 자신의 일부를 생활로써 드러낸다. 이토록 근접한 생의 단면이란. 사는 게 그렇다고 새벽이 말해주는 듯하다. 이 묘한 밤기운이 어쩐지 싫지 않다.













한 커뮤니티에서 그런 글을 봤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차고지 증명'을 못 하면 차를 판매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의 글이었다. 글쓴이는 불법 주차하는 것이 '극혐'이라며 주차비 없어서 불법주차하는 사람들은 "거지새끼"나 다름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표현방식을 문제 삼으면서도 대체로 큰 반박 없이 주장을 넘겼다.


또 다른 사례로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오프라인에서 나눈 적이 있다. 상대방은 '의지가 있는데 연애를 못 해온 사람은 찌질하다'는 의견을 펼쳤다. 나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지만 '하고 싶은 데 못 한 건 찌질한 것 아니냐'는 주장에 달리 반박하지 않았다. '찌질' 판정은 논거가 필요한 사실관계 다툼이 아니라 주관의 영역인 탓이다.


두 가지 사례 모두에서 적잖은 거부감을 느꼈다. 상대의 부정적인 의견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존중이 조금 더 필요하지 않나 하는, 사고방식의 영향일 게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그 결과 다양한 양상의 삶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주장들을 수긍하기 힘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일례로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자. 4년제 대학을 다니다 온 게 폭행을 감내해야 했던 이유가 됐던 전경 시절, 걸어온 길이 전혀 다른 이들을 접했다. 그들은 내가 알던 세계와 다른 곳에서 지내왔다. 소위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런대로 순탄한 길을 걷는다면 살면서 한 번도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다.


포주, 호빠, 건달 출신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의 상식은 내가 알던 상식과 달랐다. 당연히 행동도 달랐다. 그 기저엔 그들이 자라온 환경이 있었다.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그들은 대학을 다니다 온 나와 동기들을 '공붓벌레'쯤으로 여겼다. 우린 참 많이 달랐다.


대체로 이들의 주변엔 학교라든가 교육 친화적인 인물이 드물었다. 친구나 부모, 형제 등이 그랬다. 그것이 그르고, 내가 살아온 인생이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이들이 다른 방식의 가치관을 가지게 된 원인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 결과가 조금은 결이 다른 삶으로 나타난다.


언론사 공채 준비 기간에 만난 이도 그렇다. 농촌 지역에서 막둥이로 태어나 타인을 대하는 게 어색한 형이 있었다. 이 형은 이성에게 들이대는 족족 '까였'고, "이상하다"는 비판을 상대에게 들어야 했다. 살면서 이성을 접할 기회가 이토록 희박한 사람은 으레 그럴 수밖에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비슷한 기간에 만난 동생은 이성의 눈을 잘 못 쳐다봤다. 쑥스러움이 상대적으로 많은 성격 탓일 게다. 그래서인지 소위 말하는 '모쏠'인데, 이성을 만날 기회도 실상 잘 갖지 못했다. 같이 공부하는 기간에 이성친구들이 여럿 있었지만 특별한 썸 없이 친구로 남았다.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니다.


앞서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을 나열한 건, 한결같은 삶을 살아온 개인이 결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이야길 하기 위해서다. 이들과의 교류에서 '알지만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나 '이해는 안 되지만 불가피한 측면'에 대한 삶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타인이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란 거다.


우리는 심지어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이질감을 느낀다. 공통분모 위에서 상이한 서로의 모습이 부각될 때 이질감은 더 강해진다. 그래서인지 내가 책이나 뉴스 소재로만 접했던 삶을 살아온 이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재단하는 건 힘들다. 때로 그것이 내 무지에 의한 판단은 아닌지 의심한다.


내가 가진 이 사고방식은 특정인을 '거지'나 '찌질이'로 지칭하는 이들에게 미묘한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된다. 타인/사안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할 때 강한 주장이 발현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나 주관의 영역에 있는 문제는 딱히 시비를 가르기도 애매해 단순히 감정을 삼키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종종 이런 식의 대화를 접하고 나면 알 수 없는 피로감을 호소한다. 내 가치관을 관철시키지 못한 감정적 부채감인지 모른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고 그럴 의지도 없지만 집에 오면 가끔 분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애초에 '나와 너의 생각이 다른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훈련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한 번씩 적어두기도 한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평화주의자가 되기 위해 한 선배가 적어뒀다는 박민규 작가의 원칙이 떠올랐다. '당신이 옳아요'라고 말한다거나 '손해를 본다'는 원칙을 고수하면 꽤 많은 부분에서 감정적 소모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 간단한 원칙을 나도 좀 참고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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