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찬 하루

아주 평범한 휴일 저녁에.

by OIM



KakaoTalk_Photo_2018-06-06-19-23-08.jpeg 신촌역에서 집으로 걸어가는 일이 잦아졌다. 연대 앞, 사람들이 쏟아지는 어느 저녁 무렵.


1. 앞집이 빠진다. 이사가나 보다. 오전 내내 분주함이 울린다. 텅, 텅, 텅. 계단 손잡이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제 몸에 감당이 힘든 물건을 옮기는 중이리라. 한동안 계속되던 소음은 점심때쯤 멈춘다. 트르륵. 이삿짐 차에서 날 법한 시동 소리가 이어진다. 간다. 한동안 앞집에 살았던 사람이 어딘가로 떠난다. 이 더운 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면식이 있었다면 조금 더 슬플 뻔했다. 이별은 늘 그러하니까.




2. 속옷을 입고 바닥에 앉았다. <나의 아저씨> 6화를 보는데 땀이 스르륵 흘렀다. 이 정도로 걸치지 않았는데 땀이 흘렀다. 초여름 날씨란, 어지간해선 당해낼 수 없다. 한여름은 '한여름'이라 그렇다고 하지만 이맘때쯤은 살짝 애매하다. 에어컨을 틀까. 선풍기를 틀까. 커피숍을 갈까. 몇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다 옷을 입었다. 에어컨을 틀자니 잘 것 같았고, 선풍기를 틀자니 날개를 씻지 않았다. 이럴 때 카페는 합리적 대안이 된다.




3. 가파른 경사를 가로질러 스타벅스 DT에 왔다. 사람이 많다. '뭐 먹지' 하다가 느낌이 쌔~ 해 2층으로 올라갔다. 자리가 없다. 정말 '한 자리'도 없다. 스타벅스가 사람으로 붐빌 때는 다른 카페도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이 사실을 섣부른 기대로 지우고 스벅 연희동점으로 향했다가 또 '만석'을 목격했다. 뒷골목 쪽에 자리한 할리스도 꽉 찼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이 정도면 마호가니나 래핑폭스를 가봤자 소용없다. 고민에 빠졌다.




4.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다시 땀이 났다. 등이다. 후줄근한 기운이 등을 타고 흐른다. 6월. 현충일. 초여름. 연희동을 걷는 것만으로 땀이 배출된단 사실을 깨닫고 사러가 마트 앞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간다'와 '카페를 뚫는다' 사이에서 갈등하다 괜히 빨랫감이 늘었단 사실에 뭐라도 하기로 했다. 그래서 들어온 곳이 스벅 연희동점. 내가 들어올 때 나가던 사람의 자리를 운 좋게 차지했다. 이 글은 그곳에서 쓰는 중이다.



KakaoTalk_Photo_2018-06-06-19-23-10.jpeg 신촌 명물거리에 식빵전문점이 생겼다. 가격은 거의 2,900원. 초코, 마늘, 치즈모카식빵을 사서 집으로.


5. 요즘, 편하다. 적당히, 아주 적당히 일을 하면 월급이 나온다. 일에 어떤 의미는 없다. 정시 출근에 칼퇴를 하고, 회식도 없다. 빨간 날은 쉬며 꼬박꼬박 급여를 받는다. 이런 일에 비용을 지불하는 오너의 의중을 나는 알 수 없지만 모처럼 한가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삶. 기자 일을 할 때 꿈꿨던 개인생활이 보장된 나날들. 여윳돈을 굴리듯 이 시간을 투자할 거리를 찾아야겠다.




6. 출퇴근 길엔 책을 읽는다. 편도 80분 정도 거리니까 지하철에서 집중해 읽으면 이틀이나 사흘에 한 권씩 끝낼 수 있다. 그렇게 읽은 책이 근래 3권 정도. 예전처럼 발제 거리를 찾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도 훨씬 덜하다. 나름 이런 시간을 즐긴다. 다만 예상보다 책을 마치는 속도가 빠르다 보니 서평을 전혀 못 쓰고 있다. 어딘가 과제처럼 여기면 또 부하가 될 것 같아 그 경계에서 갈등한다. 쓰긴 해야 하는데...




7. 사진도 그렇다. 리코 GR2라는 작은 카메라를 샀다. 스냅용으로 나름 유명세를 떨치는 모델이다. 카메라로 돈벌이를 할 게 아니라서 이 정도에 만족하고 있다. 꾸준히 사진을 찍어 올릴 생각이었지만 어렵다. 2008년부터 DSLR만 쓰다가 모처럼 잡은 콤팩트 카메라라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사진 공부를 게을리했다. 좋은 카메라를 써오던 부작용이 이렇게 드러난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찍으려고 인스타도 가입했다. 어색하다.




8. 딱히 이제 나를 감추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서 실명으로 인스타에 사진을 올렸더니 지인들이 찾아왔다. 팔로워가 1명씩 느는데, 모르는 사람도 있다. 개중에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은 차라리 낫다. 근데 타사 선배가 한 명 끼었다. 안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연차는 나보다 상당히 높아 보이는데 누군지 모르겠다. 이제 사진 2장 올렸는데 무슨 상황인가 싶다.




9. 비슷한 상황이 하나 더 있다. 남들 글 염탐용 페북 아이디가 있는데, 최근 전 직장 선배가 친구 신청을 걸었다. 1년에 한두 번 글을 남길까 말까 한 아이디라서 이 상황이 갑작스럽다. 선배는 내가 막내 때 부서에서 두 번째로 연차가 높아 편하게 말을 할 사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몇 번 신세를 진 적이 있어 인사를 가야지 하다가 이렇게 메시지부터 받게 됐다. 이제 진짜 한 번 갈 때가 된 셈인가.



KakaoTalk_Photo_2018-06-06-19-23-06.jpeg 거의 1년 만에 탄 신분당선은 여전히 시원했다. 신분당선에 대한 어딘가 차가운 느낌이 진짜 '온도'에서 비롯됐나 싶다.


10. 브런치는 어찌할 수 없게 됐다. 그저 하루에 10명 남짓이 새로 쓴 일기를 보고 가던 상황에 갑자기 방문자가 터졌다. 다음카카오에서 글을 집어간 탓이다. 카카오 채널에 일기가 노출됐고, 일 방문자가 10,000명을 넘어섰다. 한동안 2천 명에서 1만 명 정도가 페이지에 드나들자 내 부담감도 함께 터졌다. 평소처럼 쓸 데 없는 내용을 쓰기가 망설여졌다. 원래 그러려고 만든 페이지인데, 이게 뭐람.




11. 아참. 눈에 띄는 변화 하나가 있다.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헐렁거리던 반팔 카라티가 몸에 거의 딱 맞다. 언제쯤 내 몸은 두꺼워질까 학수고대한 게 이제야 보상받는 기분이다. 맨날 보는 몸이라 덩치가 커진 걸 눈치채기 어려웠나 보다. 그저 몸이 커졌다는 이야기만 듣다가 변화를 직접 확인하자 느낌이 묘하다. 조금 더 욕심도 나고. 다만 헬스장 등록 기간이 끝나면 다시 권투를 시작할까 한다. 거의 10년 만이라 잘 될진 모르겠다.




12.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의외로 서로가 이해하기 힘든 포인트가 있다. 이 부분을 재빨리 캐치하지 못하면 상황에 답답함이 쌓이고, 그 결과 상대에 대한 어떤 편견을 낳는다. 그래서 조금 말을 섞다가 대화가 맴돈다 싶으면 적당한 선에서 끊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상대와의 관계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게 낯선 이들을 대하며 최근에 느낀 점이다. 너무 이해하려 들지 말 것.




13.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 상대를 마주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심지어 교섭이 힘든 상대일수록 대체로 피하기 힘들다. 이 때문인지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대화법> 같은 책이 팔리는 듯하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옆자리에 선 사람도 책을 꺼냈다. 그게 저 책이다. 나는 제목을 보고 속으로 빵 터졌다가, 저 책을 읽어야 할 상황을 생각하자 문득 숙연해졌다. 저 책이 필요하다면 꽤나 힘든 상황이 아닐까 싶었다.




14. 춥다. 콧물 나기 직전이다. 지난여름에도 그랬지만 역시 스타벅스는 에어컨을 짱짱하게 튼다. '반팔' 만으론 2시간 정도가 한계다. 이맘때쯤이면 보통 지나가버린 휴일이 아쉬울 만한데 어쩐지 오늘은 여유롭게 잘 쉬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틀만 더 출근하면 다시 쉴 수 있는 탓일 테다. 이런 여유를 어떻게 활용할지 올라가는 길에 생각해봐야겠다. 오늘은 헬스장도 쉬는 날이라 완전 '프리'다.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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