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선 언어의 정의

이게 다 법이 미비한 탓...(먼산)

by OIM


1. 손가락 마디 끝부분이 뜬다. 실처럼 살이 일어나는 것 있잖나. 손톱 주변으로 일어난 껍질이 위태위태하다. 일전에 이런 상태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일렬로 살이 벗겨진 적이 있다. 빨갛게 배어 나오는 피도 문제였지만 물이 닿을 때마다 아픈 속살은 꽤나 성가셨다. 그때의 기억 탓일까. 오른손에만 검지, 중지, 약지에 연이어 살이 일어났는데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2. 이 같은 상처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다. 의도치 않은 일에 생살이 뜯겨나간 뒤 피를 보고 깨닫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희한하게도 고통은 시각과 함께 동반되는데, 어디서 다쳤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어쩌겠나. 내 몸을 내가 쨌는데. 이럴 때야말로 누구를 탓할 길 없어 상황이 조금 더 야속하다. 상처를 주의해야 한다는 교훈 정도를 남긴다.



3. 사람은 이처럼 사소한 일에서 배운다. 행위에 수반되는 통증이 해야 할 일과 말아야 할 일을 가른다. 통각의 역할은 때로 이렇게 선명한데, 그래서인지 타인에겐 한 없이 무감하다. 어떤 말을 해도 책임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언어가 빚는 세상에 쉽게 노출된다. 날을 갈고 가시를 세워 상대를 찌른다. 그 최소한의 생채기마저 목격된 바 없으니, 폭력이란 분절된 언어의 형태로 온라인상에 구현된다.



4. 최근 유튜버 양예원 씨 사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3년이나 지난 일에 다시금 칼을 꽂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양 씨와 이를 반박한 스튜디오 실장의 각기 다른 입장 위에서 대중은 세 치 혀로 상대를 농락하고 나섰다. 익명성이란 으레 그런 곳에서 활용하는 것이라는 교본 마냥 무책임한 말들로 무대 위를 난사한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5. 어마어마한 관심. 시기도 그렇거니와 문제의 본질이 주변의 도움을 요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관심의 방향성이 어째서 피해자를 위로하는 쪽보다 가해자로 지목받은 이를 할퀴는 데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결과 사건의 실타래가 한 올씩 풀릴 때마다 서로는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우스운 상황이 벌어진다. 맞은 만큼 돌려주는 함무라비의 정신에 따라 사건의 반전은 곧 자신들의 실책으로 이어졌다.



6. 안중에도 없다. 피해자나 가해자 일은 이제 일종의 가십에 불과하다. 애초에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핏대를 세우다 보니 대중은 서로에게 쇳소리를 질러댈 뿐이다. 양 씨나 스튜디오 실장을 지금 당장 '단두대'에 올리지 못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지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해당 사건에 관심을 쏟았던 모두는 판사이자 검사다. 대중의 칼은 제물을 찾아 헤맨다.



7. 타인의 상처에 공감할 수 있는가. 이 쉬운 질문은 작금의 사태에 사치다. 성폭력을 당했다는 이의 SNS에 몰려가 갈등을 유발하고 언쟁을 벌인다. 이 과정에 상대를 위로하기보단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일이 우선이 돼 버린다. 감정의 배설구로 탈바꿈한 그곳에 사안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애초에 놀이를 허용받지 않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꼴이다.



8. 자신의 자유가 타인의 상처에 우선돼야 하는지 묻는다면 대부분 쉽게 답하지 못할 테다. 하지만 두 비교군을 동일선상에 놓지 못하거나 자신의 행위에 확신이 깃들면 사람은 맹목적으로 변한다. 그 결과 "잠재적 범죄충, 한남 다 뒈지라"거나 "무고 주작충 콩밥 좋아하냐"는 '비어'들이 비트(bit)를 가른다. 아프다고 호소하는 사람 앞에서 '니새끼가 틀렸다'라고 드잡이를 하는 건 어떤 언어의 위로 법인가.



9. 무작위로 파생된 날 선 말에 이미 양 씨와 실장은 만신창이다. 사회가 규정한 법과 질서에 대한 신뢰는 온 데 간 데 없다. 마치 '범인은 누구?'냐며 주변인을 죽음으로 물들이는 만화 캐릭터 '김전일' 마냥 우리는 결과에 집착하는 시대를 산다. 하다못해 김전일은 할아버지의 이름이나 걸었지, 대중은 무엇을 담보로 칼을 빼드나. 두려움이란, 새삼 성폭력을 대하는 군중의 단면에서 발견되는 것을 쉽사리 수긍하기가 힘들다.



10. 이번 사건은 다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래전 일인 데다 쌍방의 주장이 다르다. 기록의 소실 정도도 문제다. 양자 간 갈등이 아니라 3자 간 문제로 얽혀있으며 책임소재 구분이 불분명할 수 있다. 2차 피해는 이미 발생했으며, 사실관계에 따라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다. 애초에 입증이 어려운 성폭력의 특성도 문제다. 이 같은 상황에 여론의 활시위는 조금 더 신중해도 좋다.



11. 필요한 정보는 기사를 통해 공개된다. 굳이 의견이 같지 않은 상대를 닦달해 근거를 내뱉으라 윽박지르지 않아도 우리는 양질의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그저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일이 이토록 쉬운 과정을 거친다는 자각을 이번 기회에 다 함께 할 수는 없는지. 손가락을 놀리는 일만으로도 상대가 다칠 수 있음을 모를 순 없을 텐데 말이다.





*부분 실명제라든가 **기록 잔존 법 등을 통해 보완책 마련에 나설 순 없는가. 가령 댓글이나 글을 남기는 아이디를 포털이나 SNS와 무관하게 단일화해 개인의 댓글 내역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든가(=부분 실명제), 인터넷에 남긴 댓글이나 글을 일정 시간(약 3~5년) 동안 지울 수 없게 법령을 제정하는 방법이라든가.


우리 사회가 웹을 통해 보내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지는 듯한데 관련 규정이나 교육 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부작용이 커지는 걸 지켜만 봐야 하나 싶다. 사이버 불링도 그렇고 익명성을 이용해 혐오발언을 쏟아내는 현상도 그렇고 관리당국은 사안을 너무 안일하게 보는 것 아닌가.


피해자의 입장이 돼 본다면 대안 마련의 시급성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점에서 국회 일 좀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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