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이꺼이 울었다, 아까워서.
다녀오고 하루를 꼬박 잤다.
그 여파를 몰아 제주를 남긴다.
1.
새벽 2시에 풍기는 버터 냄새는 비인간적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엌을 마주한 이웃집에서 뭔가 굽는다. 아니면 데우거나. 고소하고 달콤한 버터향이 대기 중에 퍼지는데 구운 빵 또는 요리 류가 분명하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내 탓인가 싶다가도 한 번씩 부엌으로 눈길이 가는 게 불안 불안하다. 나도 베이글이 있단 말이다.
2.
면접 후기. '허탈하다'는 총평이 적합한 제주행이었다. 이번 면접은 다소 무리해서 결정한 일이기에 성과가 좋길 바랐다. 적어도 제주로 가든 안 가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길 원했다. 면접 보기 전까진 최소한 그랬다.
면접은 엉망이었다. 이력이나 자소서 파악이 하나도 안 된듯했다. 면접관의 질문에서 그런 경향성을 읽을 수 있었다. 예컨대 "기사 쓸 줄 알아요?"라는 질문은 경우에 따라서 굉장히 무례한 메시지가 된다. 나처럼 포트폴리오를 첨부한 경력직을 대상으로는 더욱 그렇다.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온 거예요?"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의도나 의미 파악이 무익할 정도로 면접에 어울리는 질문인지 알 수 없다. 이어진 질문은 "비행기 값 얼마였어요?"다. 서로에게 주어진 몇 분 남짓 안에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라곤 도통 생각할 수 없다.
뒤따른 질문도 가관이다. "이곳에 오면 지리를 잘 모를 텐데 어떡하려고..."란다. 내비게이션 없는 차가 드문 시대에 살면서 어떤 대답이 듣고 싶었을까. 더군다나 '지리'나 '거주지' 등을 문제 삼을 거라면 애초에 해당 지역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면접에 부르는 게 옳다.
'계약직으로 종사했던 직장에서 왜 2~3년을 채우지 않고 나왔냐'는 질문에서는 언론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언론사가 타 직종에 비해 나이에 관대한 편이지만 늦깎이 지원자들에게 1~2년은 공채 합불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첨언하자면 나는 공채로 입사할 당시에도 동기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계약직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1~2년 더 근무했다면 서류 통과 자체가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즉, 내가 어떤 시기에 계약직으로 일했고 언제 기자로 입사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면접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제주행을 선택한 내가 한심할 정도의 질문을 면접관에게 연달아 받고 나자 도무지 나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꽤 불쾌한 기분이 땀처럼 흘러내리는 와중에 자본주의 미소를 짓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참을 수 있나.
하지만 나는 공사가 다망한 구직자인지라 그저 그렇고 그런 질문들에 성실히 답하곤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뭐든지 하고 또 열심히 살겠다는 삶의 자세가 사람을 이렇게나 바꾼다고, 스스로에게 놀라며 내리쬐는 햇살에 '시라방, 할아방' 모진 소리를 뱉었다.
내가 면접을 보고 난 뒤 든 생각이 뭐였냐면, 과연 내가 받은 질문들로 면접자를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분별력이 전혀 없는 질문으로 구성된 가상 질문 세트를 받은 것 같다. 솔직히 카톡이나 문자로 물어봐도 됐을 법한 질문의 향연. 그렇다면 서울에 있는 나를 대체 왜.
경력직 면접을 가면 대체로 그런 걸 묻는다. 어떤 기사를 써왔고 어떤 기사를 쓰고 싶으며 관심 있는 이슈나 분야가 무엇인지 따위. 추가적으로 가진 능력(사진)도 종종 관심 대상이 된다. 이력에 대한 질문들도 주를 이룬다. 시의성 있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근데 이건 뭐...
하다 못해 물어본 직무 관련 이슈는 4년 전 이력에 관한 것이었다. 기사를 인터넷에 올리는 작업을 할 줄 아냐고도 물어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의아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질문에 답하려고 15만 원을 내고 비행기를 탄 게 아닌데, 이건 마치 세무사에게 '홈텍스' 이용할 줄 아냐고 묻는 꼴 아닌가.
3.
면접 후 근처에 있는 웨스턴 조선호텔 1층 스벅에 앉아 한참을 부들부들거렸다. 기회비용이란 게 생각나서 더 분했다. 단지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결정만으로 항공권을 아낄 수 있었고, 연희동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 같은 소시민은 그 돈으로 동네에 널리고 깔린 맛집들을 들쑤실 수 있었다.
아마 한 시간 정도 그랬던 것 같다. 날은 덥고 면접은 예상을 벗어났으며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받아들이는데 적어도 한 시간은 필요했다. 이후 나는 제주에 있는 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난민 문제라든가 제주 생활 등과 관련된 현지 정보를 비교적 알차게 청취했다. 속으로 엉엉 울면서.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피로와의 싸움이었다. 면접이라서 로퍼를 신고 온 탓에 발도 아팠다. 갈아입으려고 가져온 티셔츠는 그대로 가방에 있었고 무언가를 시도해볼 기력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저 오가는 길 사진이라도 남기려 카메라를 들었을 뿐, 의욕이란 건 이미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수속을 마쳤다.
당일치기로 제주를 다녀오는 희한한 짓을 마무리하며 공항에서 문득 이번 일을 생각해봤다. 선택이 부재한 곳을 미련으로 남기기보다 15만 원에 미련을 매듭지었다고 생각하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듯했다. 나는 밤 10시 김포공항에 도착해 이렇게 긍정회로를 돌렸다. 온몸에 남은 기력을 쥐어짜서 말이다
참기름 나올 뻔.
4.
제주행을 망설이는 동안 지인들의 삶을 SNS로 살펴봤다. 어떻게들 사나 싶어서 참고가 될까 하여.
대만에서 포토그래퍼로 일하는 대만인 친구(이 문구 왠지 이상하다. 분명 친절한 문장이긴 한데...)는 한국어 번역과 영화, 잡지, 행사, 광고 사진 등을 활발히 하더니 결국 커피숍을 낸 듯하다. 'photographer'라는 직함 아래 'cafe owner'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대단.
얼굴만 아는 사이의 한 선배는 기자-홍보팀 테크를 타는 듯하더니 문득 제주로 내려갔나 보다. 카카오톡에 난 데 없이 '제주에서 일 년 살기' 같은 문구가 눈에 띈다. 책도 내고 이것저것 하는 모습이 신기하다 싶더니 자기 삶에 참 충실한 사람이다 싶다.
제주에서 만난 누나도 그곳 환경을 부쩍 자기 식대로 즐기는 모양새다. 고액 연봉자 대열에서 내려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찾아 떠나더니 제주에 정착하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요즘은 남는 시간에 봉사활동도 하는 등 시간과 여유가 묻어나는 제주에서의 삶이 좋다고.
이런 걸 보면 또 제주행을 성사시키지 못한 게 한이 되려다가도 줏대 없는 자신을 탓하며 단락을 닫아본다.
5.
이유를 알지 못하면 망설임은 언제든 너를 불러 세울 거야.
네가 마음을 정하는 그 순간에 말이지.
6.
다가가지 않으면 멀어질 일도 없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을 일이다.
다만 어딘지 무딘 일인 것을.
오늘도 마음은 고요.
7.
책에서.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_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거창한 의미나 이유가 아닌 사소한 호기심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들었어."
"의문을 가져야 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건지? 자아 발전이 행복을 준다면, 적당한 선에서 멈춰도 죄책감 따위 없어야 한다. 반드시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없다." _진민영, <조그맣게 살 거야>
"Devyni amatai, dešimtas – badas, 리투아니아어에 '재주가 아홉이면 열 번째는 굶주림'이라는 격언이 있어." _에밀리 와프닉, <모든 것이 되는 법>
"한국은 축자적 의미에서 물신주의 사회다. 물건값은 비싸고, 사람값은 싸다. 물건을 유통하는 기업만 돈을 벌고,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빈궁을 면하기 어렵다. 품목을 가리지 않고 공산품 가격이 인건비보다 후하다." _정선영, <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
8.
영화에서.
"비겁한 새끼야.
넌 너만 보지?
언제까지 평생 피해 다닐 것이여.
니는 정면을 안 봐.
그런 니가 무슨 랩을 혀."
_이준익, <변산> 중 선미가 학수에게.
9.
늘 헷갈리는 부분이라 이번에도 찾아보다가 기록해둔다. 문장부호에 관한 상식이다. 인용문 안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 <한국경제>는 맞춤법에 관해 다룬 '생글생글' 코너 198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문장부호 규정에서도 인용문에서의 마침표 처리에 관한 사항은 따로 정해두지 않았다. 다만 '마침표는 문장의 끝에 쓴다'라는 규정에 따라 인용문이든 독립문이든 문장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 마침표를 쓰는 것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우리 교과서에는 이 같은 기준이 반영돼 있다. 다만 많은 신문에서는 인용문의 마침표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문장 안에 마침표를 여럿 사용하는 게 불합리하고, 시각적으로도 매우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교과서 등 학교 문법의 적용을 받는 출판물이나 글에서는 인용문에서 마침표를 쓰는 게 규범에 맞는다.
다시 말해 "비겁한 새끼야."가 규범에 맞는 용례이나 언론에서는 "비겁한 새끼야"로 쓴다는 말. 어느 쪽으로 써도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 없으나 보다 적확한 사용법은 인용문 안에 마침표를 써줘야 한다는 것.
10.
사진은 B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