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의 도가니

'무비패스' 주연하고 '카페인' 연출하다

by O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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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습니다. 일어나서 감자조림을 했습니다. 세수만 한 채 감자 껍질을 깠지요. 채 칼이라고 하나요? 채소 껍질을 벗길 때 쓰는 기구를 이용해 반쯤 감긴 눈으로 감자 아홉 개 정도를 깠습니다.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래도 잠결에 하는 일은 그렇게 고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이점을 톡톡히 누렸지요. 네, 금방 했습니다. 감자와 함께 들어갈 양파도 깍둑 썰고, 청양고추도 세 개나 어슷 썰었습니다. 굴소스와 조림간장, 고추장, 올리고당, 설탕, 참기름으로 양념장도 만들었어요. 요즘은 블로그에 레시피를 올려두는 분이 많아 비율 맞추기도 어렵지 않았어요. 쉽게 쉽게 감자를 조렸습니다. 중형 반찬 통으로 두 통이나 나오더라고요. 단순히 손이 크다기 보단 조리가 서툰 탓이겠지요. 이번에도 분량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감자 맛은 좋아서, 참깨를 솔솔 뿌려 조림의 대미를 장식했지요. 보람찬 아침이었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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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를 펼쳐봤어요. 굵직한 일정은 적어두는 편이거든요. 오늘은 '브런치 무비패스 발표날'이라고 적어뒀네요. 굳이 몇 년 전 영화평을 긁어와 응모했던 무비패스 발급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사실 결론부터 말하면 떨어졌어요. 메일이 올 줄 알았는데 탈락자에겐 따로 연락을 하지 않나 봐요.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몇 시에 발표가 나는지도 모른 채 그냥 기다렸어요. 떨어진다는 걸 예상에 두지 않았거든요. 건방진데, 정말 그랬어요. 희한하게도 그냥 될 거라고 생각하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어디서 나온 치기인지. 선정자가 200명이라는 공고를 보고 자만했나 봐요. '200명이나 신청을 할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죠. 그런 오만의 조각들이 모이고 모여 '기대'란 걸 완성시켰고, 결과는 보다시피 와장창... 그렇습니다. 실패나 탈락 같은 건 수시로 겪는 일인데도 결코 익숙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와, 나 진짜 떨어졌구나' 하며 콜라를 꺼내는데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너무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한 탓인지 내 것(무비패스)을 남에게 뺏긴 기분이 들더군요. 이 무슨 미친 발상인가 싶어 피식 웃어버렸습니다.... 덥네요. 콜라나 마셔야지요. 덥네요,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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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 박자를 맞춰주는 게 무엇이냐면요. 오늘 오전 6시에 일어나 계속 눈을 뜨고 있었더니 심장이 요동친다는 거예요. 심장 고동이 느껴지는 그런 상태 아시려나요. 약간 기분이 고조된 것도 같고요. 처음엔 브런치 결과 기다린다고 그런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낮잠을 자지 않기 위해 주기적으로 커피를 마셨습니다. 오후 3시쯤에 이미 3잔째 들이키고 말았네요.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대형 잔은 아니더라도 나름 커피를 위해 구비한 컵에 얼음까지 넣어 마셨지요. 그 결과 어두워지기도 전에 가슴이 뛰기 시작해 아직도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네요. 카페인에 의한 각성, 뭐 그런 걸까요. 평소에도 커피를 즐겨 마시지만 이런 일은 너무나 오랜만이라 새롭기까지 하네요. 하필 또 오늘 말이에요. 상황의 극적 요소를 더해주는 것 같아 재미는 있습니다만 너무 오래가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오늘은 밤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런 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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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읽을까 해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살피는데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오르네요. 오전 10시가 채 안 된 이른 시간이었어요. 일요일이니까 '보통'의 범주 안에서 분명 이른 시간이 맞아요. 그 시간에 서대문도서관을 갔습니다. 거기서 웬 할아버지를 봤어요. 백발성성한 할아버지가 도서관 1층 로비에 있는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계시더라고요. 에어컨이 나오는 열람실도 아니고 칸막이가 있는 학습실도 아닌 1층에서요. 으레 어르신들이 그렇듯, 할아버지도 코 위에 안경을 걸치고 꽤나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어요. 게슴츠레 눈을 뜨고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시더라고요. 가만 보니 책 밑에 독서대가 하나 깔려있었는데, 이 날씨에 독서대를 챙겨 온 할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뭉클하더라고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앙상한 팔목이 눈에 띄어 그랬을까요? 할아버지는 일곱 권을 빌려온 나와 달리 달랑 한 권을 앞에 두고 열중했는데요. 책을 담아갈 비닐봉지를 다른 한 손에 꼭 쥔 모습이 예뻤어요. 그 모습이 어딘가 되게 예쁘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봤어요. 할아버지는 책을 보느라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지만요. 그때 굳이 에어컨 같은 게 없어도 문제없다는 듯 책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의 삼베옷 밖으로 앙상한 팔목이 드러났는데요. 그 전체적인 모습이 어우러지며 '늙는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할아버지는, 삶의 지향점이나 이루고자 하는 목적 따위는 아무렴 어떠냐는 자세로 책 한 권 읽을 수 있는 공간이나 내어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일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건네는 듯했어요. 물론 혼자만의 망상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꽤나 괜찮은 상상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적어둔 걸 보면 말이에요.


할아버지가 책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몰라요. 어떤 생각으로 도서관을 찾았는지도 모르고요. 그 밖에도 알 수 있는 건 드물겠죠. 그런 의미에서 젊은이의 시각으로 노년을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애초에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평생에 걸쳐 노력해도 힘든 일이잖아요? 하물며 누군가를 보편적 범주에 우겨놓고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례하지요. 그래서 대뜸 할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아 물어보고 싶더라고요. "할아버지.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이 질문은 노화에 대한 궁금증일 수도 있고 노년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내가 겪어보지 않은 세월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는 이미 경외의 대상이기에, 나 역시 늙지 않고서는 결코 그 대상에 다가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무용한 질문이 미지의 실마리나마 될까 싶어, 간질거리는 입술을 긁적거렸습니다. 책 일곱 권을 한 손에 들고서는요. 신기한 순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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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주말에는 웰메이드 드라마 <나의 아저씨> 마지막 화를 봤습니다. 아끼고 아껴둔 화를 드디어 봤습니다. 이 드라마가 끝난다는 사실이 슬펐으니 시청자치곤 꽤 열성팬인 셈이죠. 그런데 마지막 화에 더 슬픈 장면이 있더라고요. 지안이가 죽은 할머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가슴에 남은 말을 꺼내는 장면이 나와요. 대체로 괜찮았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나 할머니의 시신을 안고 말을 건네는 장면 등 다 괜찮았어요. 그랬는데, 지안이가 갑자기 그러더라고요.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할머니, 우리 또 만나자~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 뇌관에 불이 붙었어요. 순간 감정이 터졌습니다. 울컥하며 슬픔을 간신히 가둬두던 방둑이 일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격해진 감정에 장면을 놓쳐서 몇 번이나 돌려봐야 했습니다. 떠나보낸 이를 향한 그 말이 어찌나 애처롭던지요. 드라마는 끝을 맺었지만 여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더라고요. 이런 드라마가 다시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마지막에 '행복한가'라며 물어오는 박동훈의 목소리엔 하마터면 대답까지 할 뻔했네요. 참 좋은 드라마, 참 좋은 배우들, 좋네요.


*<나의 아저씨>와 <연애시대>는 소장하고 있다가 훗날 대형 스크린에 쏘아보고픈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드라마들을 1년에 하나씩만 만나도 제법 따뜻한 한 해가 될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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