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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Nov 03. 2020

비교의 굴레에서 탈출하는 법

이력서에 담지 못하는 1년


 

27살’이나’ 먹었지만 이렇다 할 직업도 없고 내세울 경력도 없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이력서를 보니 누가 보면 아무것도 안 한 줄 알겠다며, 그렇게 느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이력서가 말하듯이 정말 형편없이 세월을 멍하니 흘려보낸 것은 아니다. 치열하게 살았다고는 말하지 못해도 적어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은 몇 년간의 시간은 이력서에 적어봤자 쓸모없는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깨닫고 느끼고 나를 바꾼 시간이 내게는 소중할지 몰라도 이력서 입장에서는 빈칸만도 못한 사양하고 싶은 경험들에 불과했다. 보기 좋게 포장된 이력서가 기업엔 먹힐지 몰라도 그 이력서는 진정한 내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기에 한편으로 부정하고 싶기도 했다. 기업에게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인정받기 싫은 복잡미묘한 감정을 나만 느끼는 건 아니겠지. 몇 번 글을 고쳐 적으며 억울한 마음에 내가 근 1년간 무엇을 했고 느꼈는지 여기 빈 종이에 적어보고자 한다.


 25살에 퇴사한 이후, 한 번도 쉬지 않고 한 꾸준히 한 것은 언어공부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어다. 일본어를 공부한 지 벌써 10년 차. 대학에서도 일본어를 전공하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그리고 퇴사를 한 후에도 끊임없이 일본어를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왔고 독학, 학원, 스터디 가릴 것 없이 일본어를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면 수단 가리지 않고 찾아가 참가했다. 그럼에도 지금 내 일본어 실력을 누군가의 잣대로 비춰 보면 한없이 부족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의 잣대로 보면 더없이 훌륭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실력을 겨루며 쌓기를 반복하는 내 꾸준한 언어 욕심은 나를 ‘통대입시’에까지 이끌게 된 것이다.


약 1년간 통번역 입시학원을 다니며 27년간 겪어보지 못한 경쟁과 좌절 분노와 나약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강한 척하는 나약한 인간인지. 내 실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객관적으로 냉혹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공공연히 드러나는 실력 차이와 점수. 다가오는 시험날의 압박. 27살이라는 나이의 부담감. 그리고 돈. 나를 괴롭히는 경쟁과 비교라는 잣대. 이러한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정없이 불어나기만 해 나를 더더욱 강하게 짓눌렀다. 거기서 탈출하고자 자그마한 빛을 쫓아 허우적거리면서 내가 느낀 건 나를 짓누르던 외부의 잣대는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괴물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비교하고 경쟁하고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일의 반복. 대책 없는 이 감정들의 소용돌이는 누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실력에 자신이 없어 그걸 감추고 싶다는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욕심 때문에 점점 피폐해진 것이다. 


시험 두 달 전부터였나. 그때부터 심한 부담감으로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짧은 문장을 말하는 것조차 힘겨웠고 단어 사이사이마다 숨을 휘몰아치듯 내쉬며 부르르 떨리는 몸과 목소리를 의식하느라 글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입시로 인한 부담감의 한계를 느꼈음에도 울다가 다시 수업을 듣고, 또 울고 또다시 수업을 들었다. 그 정도로 심한 부담을 느꼈던 건 왜일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대체 왜 그런 부담감에 시달렸던 것일까. 입시 그게 대체 뭐길래. 


아마 나는 그만큼 간절 했던 것이겠지. 무조건 대학원에 합격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이것 만이 답이라는 믿음. 그 간절함이 내 목을 서서히 조여와 결국 목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게 만든 거겠지. 그렇다면 그 간절함 즉 믿음을 깨 부숴야 했다. 대학원 합격만이 답이라는 믿음. 거기서부터 잘 못된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부터 다시 곱씹어 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자 하는 게 대체 뭔지. 그건 얼마만큼 내가 원하는 일이며 혹시 그저 탈출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실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끊임없이 학생들과 비교하며 자신을 다그치는데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우 내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시험을 보고 난 후이다. 이제 와서 나는 그때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다. 그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는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시험이 끝난 이후의 감정 때문이다. 시험 당일 겨우 시험을 끝마치고 나온 내 마음은 후련함과 뿌듯함 뭐 그런 감정이 아니라 그저 허무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허무함. 약 1년간의 입시를 끝낸 내 마음은 허무함 그뿐이었다. 공부의 목적을 잊어버린 나날들과 괴로운 경험들이 가져온 건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었다. 대체 난 뭘 한 걸까. 


또 하나는 아빠가 해준 한마디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면 그건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어떤 방법과 경험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는 그 말. 새삼 처음 듣는 말도 아닌데 흐릿해진 초심을 일으켜 세웠다. 하고 싶은 일만 명확하다면 그걸 이루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간에 얼마나 돌아가던 상관없다는 사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이렇게 뼈저리게 와 닿은 적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평생 오랫동안 일본어를 하는 일. 그뿐이었다.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이를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하고자 하는 내 바람 때문이었고 정말 그뿐인 일이었다. 내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거기서부터 다잡아보았다. 물론 번역하는 일을 미친 듯이 애정 하지만 꼭 그게 아니어도 일본어를 평생 사용하며 일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거라는 믿음. 내가 지녀야 할 믿음은 대학원이라는 목표가 아니라 바로 이 믿음이었다. 그 마음이 오로지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했다. 


내가 가진 경쟁력은 뭘까. 

나보다 언어를 특출나게 잘하는 사람은 많다. 

나보다 일본재류경험이 긴 사람도 정말 많다.


일본어 실력으로 순위를 매기자면 재일교포와 원어민을 이길 수 없고, 현지 장기 거주자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럼 내가 가진 경쟁력은 뭘 까.


나는 일본어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글도 쓸 줄 알고, 디자인도 할 줄 알고, 미약하지만 중국어도 조금 할 줄 안다. 그러나 이것저것 조금씩 할 줄 알지만 제대로 뭐 하나 못한다는 생각은 때때로 나를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특출나게 잘하는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과 그걸 만들어야만 한다는 중압감. 그리고 외곬으로 큰일을 이뤄낸 전문가를 우러러보던 열등감과 경외심 그것을 깨부숴야 했다. 

반대로 생각하니 조금씩 여러 가지 일을 다룰 수 있다는 건 약점이 아니라 경쟁력이었다. 


나는 꾸준히 성장하는 사람이다. 매일 원하는 것을 찾고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이뤄가는 사람이다. 혹여 그것이 잘 안 풀리더라도 다시 무언가를 움켜지고 일어서 한 발 내딛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다.


그걸 하나둘씩 적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가진 가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입시의 쓴맛을 맛보고 나서 비로소 상대적인 ‘비교’의 잣대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남들과 비교하는 일도 서서히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자신 있는 일들과 자부하는 것들에 대해서 떠올렸다. 입시준비를 하면서도 7개월간 단 한 번도 학원을 빠진 적이 없었다는 점. 결국엔 점수가 나날이 올랐다는 점. 실력으로 창피당한 일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학원에 나갔다는 점. 책임감 사명감 꾸준함 노력 등 이 모든 모습이 내 경쟁력이었다. 


그저 승패로 가려버리는 입시전쟁의 잣대로 보자면 패배자이지만 가치라는 잣대로 바라보자면 승패는 논할 수 없다. 앞으로도 입시, 취업, 성적, 실적, 실력 등 수많은 경쟁 관계에 놓일 테지만 결코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내가 지녀야 하는 잣대가 무엇일까. 그건 경쟁도 승패도 경력과 경험도 아니고 그냥 나 자신이라는 잣대이다. 내가 가진 빛나는 장점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경쟁력. 


좋아하는 어느 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 “포기와 믿음은 한 끗 차이다.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드리면 그건 포기가 아니라 나를 믿는 일”이라고. 욕심부려 경쟁하며 이기고 낙오되는 과정을 통해 겨우 이 믿음을 얻은 것이다. 


그래봤자 이력서에 담지 못할 쓸데없는 경험일 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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