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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Dec 30. 2018

부탁 합니다

상처 받은 것들에 대한 기록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은 나를 본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다음 직장은 알아보고 있는 거니? 어서 일을 구해야 할 텐데.”

“여기 회사 지원해볼래? 연봉이 괜찮다던데.”

“이번에 새로 생긴 학원이 있는데, 여기서 애들 좀 가르치지 않을 래?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



가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그들의 걱정 대상이 되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나를 본 사람들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도와주려 애썼다.

도움을 청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은 내 뜻과 상관없이 내 인생을 걱정하며 고쳐주려 했고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난 정말 외치고 싶었다.


‘아니 저는 괜찮다니까요?!’


사실 내가 흔히 말하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골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하고 싶은 걸 몰라 방황하다 그럭저럭 한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곧 적응하지 못해서 뛰쳐나왔고 그리곤 또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선 잠시 적응하는 듯했지만 역시나 몇몇 사람들과 부딪히고 다시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리곤 지금은 집에서 그림이나 그리고 글이나 끄적거리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내 인생을 불안정한 인생이라 여길 수도 있겠다.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왜 그런 내 인생을 고쳐야 하는 거지?

혹시 불안정한 인생을 안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만으로도 드라마틱하게 인생이 안정적으로 변하는 건가? 믿을 수 없었다.

인생은 원래 불안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일, 아니 오늘도 어떻게 하루가 시작되고 끝날지 모르는 것인데

삶이 불안정하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 않은 가? 그렇기에 불안함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인 거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불안정한 삶 속에서 충분히 불안해하며 살아가면 안 되는 걸까?


나는 그냥 불안한 삶 속에서 충분히 불안해하며 살고 싶다.


홍세화 작가는 포용을 이렇게 정의한다.
‘상대방의 의견이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대로 용인하는 것.’


불안해 보이는 남의 인생을 고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포용해 주자.


누군가의 삶을 그 삶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 가슴 속 깊게 뿌리 박힌 편견은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어느새 '그 사람’을 자신의 틀에 넣어 판단하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는 종종 이런 얘기를 듣는 다.


‘연애는 이제 포기한 거야?’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 ‘머리 기를 생각은 없어? 그냥 남자가 되고 싶은 거야?’

‘앞 일을 생각해서 이젠 머리 길러.’


‘머리가 짧은 여자’는 머리가 짧은 여자일 뿐인데,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머리를 자른 것에 이런저런 참견을 받아야 한다.

이상하지 않은 가?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왜 불쾌함을 느껴야 하고 잘 못 되었다는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거지?

문제는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자신이 뱉은 말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이고,

상대를 포용해주자고 외치는 사람은 늘 상처 받았던 쪽이라는 것이다.


왜 먼저 생각해 주지 않는 걸까? 왜 말하기 전에 생각해보지 않는 걸까?

남의 시선으로 내 모습이 멋대로 결정되는 것을 볼 때마다 말하고 싶었다.


쉽게 말을 뱉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보다 생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만의 프레임에 상대를 맞추지 않으며, 머리가 짧은 여자를 보아도 그저 ‘머리가 짧네.’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머리가 짧으니 멋대로 이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 해버 리거나, 이렇게 고쳐야 한다고 말해버리거나,

여성적이거나, 혹은 남성적이거나, 멋대로 판단하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례한 사람이 되지 말자.




“퇴사자, 취준생, 26살, 백수, 여자.. 아니 아니 그런 나 말고, 그냥 나! 나를 봐달라고!"



나도 모르게 생긴 꼬리표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나를 그냥 나로 봐줄 수는 없을 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포용해 줄 수는 없을 까? 불안정해 보이는 나의 삶도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는 없을까?





이림 / 상처 받은 것들에 대한 기록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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