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의 서재 독서 기록
싸움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마냥 싫어하지도 않는다. 치고받고 싸우는 거는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의견충돌이나 오해로 인한 말싸움은 괴로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해를 푸는 방법도 다음에 싸우지 않을 방법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니까.
용서는 대단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화해도 용서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한다. 마음이 결정하는 일인데 억지로 화해하는 건 싫다. 아이들이야 다양한 이유로 삐치고, 다툰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하나같이 화해할 땐 "내가 미안해. 다음에 안 그럴게", "괜찮아. 나도 다음부터 조심할게"가 자동이다.
나는 서로 입장 차이를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거다. 일방적으로 잘못하면 미안하다고 해야 하지만, 때론 오해라서 미안할 일이 아닌 경우도 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3초도 안 되는 시간에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안 괜찮아서 선생님 찾아온 거면서. 안 괜찮으면 안 괜찮다고 하면 돼."라고 말한다. 정정하는 아이가 꽤 있다. 사실 안 괜찮다고.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 내라고 할 때면 '정직하게 살자'가 들어갔다. 다른 어떤 잘못보다도 거짓말에 엄하게 하셨다. 거짓말, 사실이 아닌 말이라던가 진심이 아닌 말이라던가.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결단코 없을 거다. 나는 해결책으로 사용하는 거짓말은 일찍 뗐다고 본다. 사실대로 말하면 넘어가겠다는 말을 수시로 들어 왔다. 근데 똑같이 혼났다. 비교할 수가 없다. 사실을 먼저 말해서 혼나면 거짓을 말해서 혼날 때랑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고 그냥 혼난다. 그렇지만 거짓을 말할 때 소모되는 기운이 커서 사실을 말하는 걸 우선으로 삼았다.
막상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만나다 보니 거짓말하는 게 이렇게 잘 보일 수가 없다. 증거가 확실해지면 사실대로 말하라고 한다. 내 경험이 그랬듯 거짓말한 아이도 궁지에 몰려 인정하는 순간 어차피 혼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전한다. "거짓말을 해서 ~이렇게 ~저렇게 되었으니 안 혼날 순 없고, 사실대로 말하면 덜 혼나"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신호였는데 거짓말로 나와 대화를 많이 했던 아이들은 내 말을 믿어주곤 나날이 사실을 인정하는 시간이 빨라진다.
아이의 거짓말에 실망이 큰 건 내가 마음을 많이 줘서 인가, 더 사랑해서인가. 어느 시점부터는 아이에게 믿을만한 어른으로 자리했다면 거짓말할 만한 필요가 없는 대상이었겠지 싶어선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 '사실이 아닌 건 알고 있지만 계속해봐' 하는 마음으로. 나는 신뢰 가는 대상이 되고 싶었는데 작가는 더 나아가서 먼저 아이를 믿어준다.
학창 시절에 박현희 선생님(작가)을 만났다면 수업이 즐거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로 사람 사는 얘기, 경제, 정치, 역사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중학생 때, <신데렐라>를 주제로 발표한 적이 있다. 전하고 싶은 말은 '왕자가 정말 신발로 신데렐라를 찾았을까?'다. 교탁에서 서서 친구들한테 신발 235 신는 사람 손을 들라고 했다. 여럿이 손을 들었는데 여긴 신데렐라가 너무 많다 싶었다. 왕자는 어떻게 신데렐라를 찾았을까? 사실 신데렐라의 외모를 보고 한눈에 반했고, 유리구두는 명분이 아니겠냐며 큰소리쳤다. 친구들은 웃고, 나는 동화를 이렇게 읽을 수 있는 학생이라며 흡족해했는데 선생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이 지났으니 그만 들어가라고 했다. 작가를 만났다면 나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인생 게임은 즐겁자고 하기보단 경쟁하고, 생존해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특출난 재능을 가지지 않았고, 공부에 흥미가 없는 나는 학교 시스템 안에서 자연스레 밟고 밟히는 상황에 정신 차리기 힘들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눈치껏 펜을 잡는다 한들 갑자기 성적이 오르진 않으니까. 상위권이 아니어도, 악착같이 공부하지 않았어도 시험은 부담스럽다.
공부하는 친구들은 고생한 나날에 보답받듯 원하는 대학에 가거나 꿈에 한 발짝 가까워진다. 대체로 상향 지원해야 하는 난 선택지가 좁았다. 그래서 게임의 규칙을 잘 이해해야 했고, 그 과정을 학생 혼자 하기엔 버거운 감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는 꿈이 명확했고, 투자에 비해 높은 헛된 기대를 하지 않았다.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 들으면 다 알만한 대학을 졸업했다면 좋았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돼 충분히 즐겁다.
개천에서 나는 용을 보기 어렵고, 출발선이 다르다. 더 이상 의무교육을 받는 학생이 모두 동일한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없고, 입시 당사자인 학생 개인만 게임에 참가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돈 없고, 시간 없는 경우 시작이 다른 친구와 자신의 격차를 체감하며 버티거나 좌절한다. 그마저 느낄 새 없이 사는데 급급한 경우는 어떨까. 나는 교육의 필요 이유가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교육만큼은 모두에게 기회가 있고, 여유 있는 자리가 제공되길 바랐다.
생물학적 여성으로 살면서 어둡고, 낯선 골목은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에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워서 피한다. 그래서 어린 빨간 모자도 샛길만큼은 피했으면 했다. 샛길이 유혹될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른이 된 나는 어린이보단 위험을 판단하는 눈과 대비하는 자세가 갖춰져 있으니까 어린이의 반짝과 근질거림은 존중하되 안전을 위해 동행해야겠다. 낯선 곳이 익숙해질 때까지 같이. 직관적인 '길'은 이미 나 있는 곳이라면 추상적인 '길'은 개척에 가깝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건 당장 증명하기 어렵고, 불명확하다. 그런데도 나아 간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윤곽을 드러낸다. 누군가 열고, 누군가 갖춰 놨을 길을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다녔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이후로 센터에서 모든 장난감을 치웠다. 한정된 공간에 아이들이 촘촘히 모여 있으면 위험하니까 자유로운 놀이 시간을 줄 수 없는 예외적인 시기였지만. 당장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장난감을 치웠으니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지 않게 하려면 선생님이 바빠야 했다. 2년쯤 되니 빈 시간을 활용하다 못해 부족하다 느끼는 나와 장난감이 없어도 놀 줄 아는 아이들이다. 스마트폰 중독에 불만을 가진 보호자에게 스마트폰보다 재밌는 시간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과 관계 맺는 데 좋은 기억을 가진다면 스마트폰에 몰입할 일이 적을 게 분명하다.
갖고 싶은 걸 다 가지지 못하는 자의 정신 승리일지 모르지만, 부족함을, 적당한 불안감을 느끼면서 성장할 거다.
학창 시절엔 '학생다운'이라는 어른이 만든 규정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했으면 했다. 살아온 날이 다른데 선생님의 경험치가 학생보다 앞선 게 당연하겠지만, 어른 세계에 발을 들였다고 해서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것처럼 내 경험이, 생각이 전부라는 건 오만이다. 편견은 새로운 경험을 하지 못하게 한다. 탈색한 학생이라면 학교생활에 모범적이지 않을까?, 모든 탈색한 학생이 그렇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탈색하면 머리가 상한다. 머리가 상할 거라는 걸 몰랐다면 알려주면 될 일이고, 알았다면 후회마저 학생 본인의 몫이다.
과거 사진을 보니 예쁘다고 생각했던 모습이 별로일 때가 많다. 지나가던 선생님께서 학생은 있는 그대로가 예쁜 거라던 말이 떠올랐다. 어른이 되고 나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후회하는 모습이 싫지 않다. 그저 나이 먹어 가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는 게 좋았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다 한들 하얗고, 빨간 화장을 했을 거다.
개미처럼 살길 원하고, 베짱이보단 개미로 있고 싶은 난 지날수록 재밌게 일하는 환경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일이 되면 재미를 잃는 것도 있고.
즐거운 개미가 되고 싶다. 먹이를 이고 가는 길에 잠깐 딴짓하고, 맛있는 간식 먹을 틈도 마련하고, 잘 쉬고, 힘내서 일하는 그런 개미.
인간관계는 나이나 특별한 기점 없이 수시로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사람마다 고유 개성과 경험이 다르니,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는 당연하다. 와중에 주어진 시간 동안은 합의된 다툼이 허용되는 토론에 참여할 일이 많았고, 다툼이 생기면 끝에 직접 마무리하는 등 살아가는데 필요한 갈등 경험이 누적되면서 비교적 관계 스트레스에서 빨리 벗어난다고 느낀다.
갈수록 혼자가 편한 아이들, 굳이 갈등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아이들, 참기 싫은 아이들이 늘어나는 건 사회 전반의 변화려나. 과도한 공동체 중심은 위험하지만, 같이 사는 방법을 공부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도움을 받게 되는 때가 올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가능성이기도 한데 그러다 보니 상대적 빈곤과 결핍을 느끼기 쉽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돈이다. 올라가기만 해야 하는 삶이자 스스로 누군가와 비교하며 사는 삶은 괴롭다.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싶다. 한 번만 주어지는 인생, 주어진 만큼의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인간관계에 질려 혐오가 아닐까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도 관계 맺음의 소중함을 얘기한다. 관계에 따르는 부정을 안더라도 긍정이 더 크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 한 명이 불편한 사람 몇 명을 대체해줄 만큼 삶에 영향을 준다. 감사한 사람이 모였을 때 살아 있어서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나쁜 말로 흔들어도 나로 돌아올 수 있다고 느꼈다. 인간관계에 데인 게 없는 사람이 하는 실없는 소리가 아니다. 위험을 겪었지만, 모험을 피하지 않아서 얻은 선물 같은 관계다. 첫 만남의 관점을 바꿨다. 관계란 랜덤박스 같은 것. 어떤 사이가 될지 몰라서 두근두근한.
고등학교에선 대체로 수업 시간엔 잠을 자는 일이 많았다.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았고, 방과 후부터 저녁까지 아르바이트했기 때문에 잠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잠을 자지 않는 수업이 있었다. 몰려오는 잠을 눌러서라도 듣고 싶은 수업이 있었다. 수업이 재밌어서가 아니라 선생님 기분을 생각할 정도로 감사한 선생님이 계셔서. 모범 학생이 아니었다는 걸 안다. 잠을 자면서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않은 아이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그래서인가 잠을 자는 것에 반항한다고 느끼거나 화가 나진 않는다. 내가 뭐라 하는 것도 웃긴다고 생각하고. 그냥 즐거운 일이 있으면 나아지지 않을까. 그게 안 된다면 나랑 좋은 관계를 맺으면 노력하지 않을까. 아이가 노력해야 할 것도 분명하지만, 나도 노력하면 변화가 빨리 오겠지 싶다.
성인의 삶이 좋다. 원하는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돼 즐겁다. 때가 온다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나의 때는 학교에서 올 수 없었고, 오지 않았다. 시기가 다를 뿐 분명히 배움의 때가 올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