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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Feb 06. 2023

울타리 밖 사랑 - 프롤로그

20대 마지막 생일을 보내며

 종종 주변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거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이거나 바로 부정했다. 이제는 '아, 그렇게 보이나요?' 하며 적당히 웃고 넘어간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진 가정이라는 영역은 나에겐 정서적인 지지를 주는 곳보단 얼른 독립해서 분리되어야 하는 곳에 가까웠다. 학창 시절 나에게 소중한 세 가지를 종이 위에 적어보라 할 때 친구들은 '가족'을 적었지만, 나는 그 단어를 적지 않으면 이상해 보일 거 같아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였다. 결국 종이 위에 적지 못했지만 말이다.


 독립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행복한 정상가족을 보면 낯설고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며 자기 연민에 빠졌다. 망가진 울타리 안에 있는 기분이랄까. 올 가을 몇 년 만에 과동기 A를 만났다. 독립을 하지 않았던 대학 시절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집에서 일어난 일을 종종 A에게 말했다. A는 내가 했던 이야기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독립을 한 이후로는 A를 그날 처음 만났는데 그때 A가 나에게 해준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잘 살고 있네. 운명의 무게를 짊어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낙타처럼.' 나도 모르게 지난 시간 동안 억울하다고 느꼈던 운명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고, 나는 생각보다 꽤 잘 살고 있었다.


 올해는 20대 중 가장 만족스러운 한 해를 보냈다. 나를 속박하던 사회적 시선과 세속적인 욕구들로부터 한층 자유로워졌고, 심지어 삶의 초연함까지 느꼈다. 나는 혼자 있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나를 단단하게 만든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지?' 그 물음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정도 생각이 트였다. 나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맞다. 사람의 성격이 형성될 때 유년기에 가정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놀랍게도 나는 가정에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을 밖에서 전부 받았다. 울타리 밖의 사랑이 내 성격의 많은 부분을 형성했다. 중학생 때 '네가 모르는 부분 잘 알려줘서 시험 성적이 많이 올랐어'라고 말해 준 같은 반 친구, 고등학교 2학년 때 매번 혼자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나에게 '역시 배혜림, 너는 꼭 성공할 거야' 라며 지지를 보내준 옆 반 선생님, '당차고 확고한 모습이 부러워, 다시 태어나면 너로 살아보고 싶어'라고 한 동아리 친구의 말까지. 나는 타인이 건네준 크고 작은 온기를 대부분 기억한다. 사소한 디테일까지. 그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슬프고 억울하고 무기력한 감정이 나를 덮칠 때마다 모아 놓은 온기를 다시 꺼냈다. 그 온기로 얼었던 마음을 녹이며 일어섰고, 뭐든 할 수 있다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렇게 타인의 온기를 발판 삼아 나를 바꾸고 성장시켰고, 받은 온기가 식기 전에 또 다른 타인들에게 건넸다. 주변에서 나에게 무심코 던진 사랑을 받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아직도 정해진 운명을 억울해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생을, 다른 행복한 가정을 시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0대의 마지막 2년 간 나는 '인간은 안 돼', '인간은 그만 태어나야 해', '빌어먹을 호모 사피엔스!'를 자주 외치고 다녔다. 다시 돌아보니 나는 빌어먹을 호모 사피엔스들에게 빚을 지며 자랐다. 30대에는 이 사랑을 갚아나가며 증명하고 싶다. 사회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정 내 관심과 사랑, 그 내리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울타리 밖에도 당신을 길러줄 사람들이 참 많다고. 그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온기를 차곡차곡 모으라고. 혹시라도 마음이 자꾸만 식는다면 내가 온기를 주겠다고.


 나는 울타리 밖에서 사랑을 던져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지난 시간 동안 받아온 사랑을 갚기 위해서고, 이 사랑을 다 갚기 전까진 사회생활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내 사랑이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정도로 타인의 삶을 더 유익하고 풍요롭게 변화시켰으면 좋겠다. 내가 베풀 사랑이 더 낮은 곳으로, 더 추운 곳으로 가닿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다시 뜨겁게 끓여보고 싶다.(2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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