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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Nov 05. 2023

나의 아름다운 실패

법륜 스님과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왜 좋은 결과가 오지 않지?


지난여름,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에서 법륜 스님은 인생사를 기계론적으로 이해하면 삶이 더 괴롭다고 했습니다. 올해 약 반년을 의도적으로 쉬면서 사회생활의 갈증은 커져만 갔습니다. 성향 상 휴식이 어려운 저는 무료함이 절정에 달해갈 때쯤 그동안 일해보고 싶었던 K진흥원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담당 사업은 고용노동부의 4차 산업 분야였고, 새로운 영역, 가까운 직장, 내가 사랑하는 나의 고장 K시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저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준비물은 단순히 '자신감'뿐이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직장과 사업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반년을 쉬고 오니 많이 조급했나 봅니다. 빠르게 달리며 나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삶은 오히려 다시 멈추라고 했습니다. 쉽지 않은 사람들, 맞지 않는 일 처리 방식, 조직 내 갈등 등은 처음의 '잘해야지!'로 시작한 마음가짐을 '버텨보자..'로 바꾸는 데 채 며칠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면접에서 보여준 다짐은 짓뭉개졌고 강한 책임감, 적극성, 늘 배우고자 하는 태도 등 그동안 일을 하며 쌓아온 저의 특장점들은 이곳에선 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의 특장점들이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했습니다.


저는 상사와 동료들을 쉽게 미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터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건 늘 타인이라고 여겨왔습니다. 놀랍게도 이번엔 타인에 대한 원망보단 지금의 상황으로부터 당장 벗어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더욱 컸습니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꼭 넥스트 스텝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나?', '이직할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벗어날 자격이 없나?',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일 말고 뭘 하고 싶지?' 뾰족한 목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해 정규직 공채를 준비하지 않은 스물다섯의 나, 문과를 선택한 열일곱의 제 자신을 찾아가 추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문득 과거의 나를 찾아가 탓하기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았습니다.


매일 부딪히는 신선한 업무들, 새로운 관계들, 역동적인 사업 현장은 지난 반년 간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매 회차 교육을 끝내고 강사님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다음 회차 교육을 준비해 나갔습니다. 협업기관의 동갑내기 대리님과의 담당 사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소통하던 시간 또한 유익했습니다. 지난 직장에서의 경험치들은 백지상태의 사업을 스케치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때의 성취감은 일을 하면서 찰나의 행복을 느끼게 해 주었고, 저는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메모앱 속에 써 놓은 일기를 펼쳐보았는데, '지금까지 쌓아온 일의 경험치가 무너질 것 같다'는 나의 고통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나와 맞지 않는 조직, 사람, 시스템... 저는 꽤 괴로웠습니다. 일찍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천장을 바라보며 아쉬운 것들에 대해 하염없이 생각했습니다. 더 나은 매일을 살기 위해선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내려놓을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비록 저는 집에서 천장을 보며 서럽게 울었지만, 상사에게 퇴사 의사를 알린 날 시원하게 다이빙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 수영장에서 저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멋지다며 박수를 쳤습니다. 어쩌면 나는 내 결정에 만족하고 있는 것일지도요.


지난 두 달간 타인에게 많은 의지를 했습니다. 같은 고통을 겪으며 동고동락한 J주임님. 그는 필요한 정보를 즉각 공유해 주었고, 절대 비굴하게 일하지 않도록 많은 순간을 함께하며 저를 챙겨주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조직에서 만났어도 환상의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협업기관의 L대리님은 매번 현장에서 저에게 실무 고민을 던져주는 긍정적인 자극제였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늘 사업과 현장 고민들로 넘쳤습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청소년 교육을 추진하고자 갖은 방법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능력 있는 실무자이며, 그가 나의 동료였으면 하는 욕심이 났습니다.

동료의 정을 나눠 준 앵커센터 운영사무국의 매니저님들에게도 큰 고마움을 느낍니다. 우린 다른 소속이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며 자주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앵커센터에서 함께 맨땅에 헤딩을 하며 희로애락을 나눴습니다.

한국항공대 비행교육원의 교관님을 비롯한 스마트드론공학과 선생님들은 저에게 유쾌하고 즐거운 추억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우려 속에 급하게 진행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문성을 가지고 안전하게 교육 사업을 진행해 주었습니다. 그들을 보며 대학 시절의 나는 타인에게 어떤 에너지를 주던 사람이었는지 잠시 되돌아보았습니다. 드론 교육에 큰 흥미를 느끼고 즐거워하는 청소년들을 보며,  스마트드론공학과 선생님들의 미래가 궁금해졌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참 행운일 거라 생각합니다.

비록 저는 진흥원이라는 조직 적응에 실패했지만 일을 하며 조직 외부에서 귀한 인연을 얻었습니다. 지난 두 달간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조금의 후회도 없습니다. 짧았지만 내가 만난 인연 덕에 종종 행복했고, 그들이 만들어준 시간을 재료로 이 글을 써내려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는  <지난밤 잠을 자며>라는 시에 이런 구절을 썼습니다.

지난밤 잠을 자며 꿈을 꾸었네
얼마나 축복받은 환영인가!
여기 내 가슴 안쪽에 벌집이 있었네
황금 벌들이 내 과거의 실패로부터
흰 벌집과 달콤한 꿀을 만들고 있었네

인생은 기대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생은 흘러갑니다. 지나가버린 것에 집착하면 괴로울 뿐이고, 매일매일 닥치는 물을 맞이하라고 졸업식 당일 법륜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늘 일해보고 싶었던 조직에 들어가 향후 2년 간 국책사업을 근사하게 완수할 거란 나의 기대 속엔 오만과 무지로 가득했습니다. 삶은 직접 겪어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실패를 인정하되, 이 시간을 고통으로만 기억하지 않도록 예쁘고 정성스럽게 다듬고 보관하여 윤기 나는 꿀을 만들어보려 합니다. 꿀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생은 저를 더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다주고 멋진 만남을 가져다줄 테니깐요.


오색찬란한 감정을 느낀 지난 두 달. 더 추운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을 예쁘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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