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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Feb 12. 2023

삶을 사랑하는 연습

집을 다시 짓기 위한 질문과 기도

'딸깍'


불이 꺼졌다.

벽을 더듬으며 스위치를 찾아 다시 불을 켰다.

그리고 나는 다른 방에 있었다.


'축하합니다.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한 해 천하태평하게 잘 살았죠? 이제부턴 실전입니다. 앞으로 남은 생에서 경험할 온갖 번뇌의 미리보기를 체험하게 해 드리죠. 당신이 지난 20대에 세워 놓은 요새는 현재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 이후론 먹히지 않아요. 이 번뇌를 맛보며 자신의 집을 다시 지어보세요. 인간관계, 취향, 가치관 싹 다 뜯어 고쳐야 합니다. 자, 여기 불안, 허무, 권태, 실망을 드립니다. 잘 살고 싶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지나가버린 자랑스러운 과거만 들먹이며 자만하지 않길.'


아, 여긴 그 방이다.

20대 초중반에 잡혀 있었던 그 어둠의 방.

그때와 오묘하게 다르긴 한데, 어쨌든 난 방에 갇혀 있다.


아픈 몸으로 시작한 2023년. 예상치 못했던 어둠과 공포가 찾아왔다. 지난 연말에 내가 세워 놓은 계획과 결심들이 모두 지워졌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지난 한 해 나에겐 아홉수가 없었다는 오만 때문인지 늦은 먹구름이 드리운 것만 같다. 세상이 참 밉다.


낫지 않는 몸, 풀리지 않는 일, 유쾌하지 않았던 여러 만남들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더이상 누군가를 미워할 에너지마저 고갈되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사랑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을 찾았다. 프롬 선생님, 당신은 현자가 아닙니까? 제발 제 삶에 사랑이 드리우게 해주세요. 저를 옥죄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거둬주세요.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비법은 없지만 많이 배울 수는 있다. 망상을 버리고 타인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 계속 밖으로만 나다니지 말고 자신에게 가는 길을 배울 수 있는 사람, 생명과 사물의 차이를, 행복과 흥분의 차이를, 수단과 목적의 차이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폭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을 향해 이미 첫걸음을 뗀 셈이다. 첫걸음을 뗀 후엔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질문에 맞는 의미 있는 해답을 이런저런 책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답은 자기 안에 있을 것이다.(<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中)'


선생님, 있는 그대로 보고, 자신에게서 배우라고요? 저는 지난 20대를 그렇게 살기 위해 치열하게 지냈어요. 전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고 싶지도, 소유하고 싶지도 않았고, 깻잎 한 장 차이인 사랑과 폭력을 구분하려 부단히 노력했어요. 그런데요, 선생님. 아직도 세상이 미워요. 다들 그렇게 사랑하고 있진 않는 거 같아요. 우린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소유하고 과시해요. 사랑하기 위해 자기 안에서 답을 찾기보단 타인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거나 정해진 룰을 따르는 걸 선호하죠. 자본주의 시대에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선생님, 제가 바봅니까?


노트를 적다 말고 책장을 덮었다.




프롬의 이론만으론 지금 당장 삶을 사랑하기 어려웠다.

지나간 과거나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를 살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다. 나도 그 말에 백 번 동의하지만 여전히 나는 오늘이 계속 미웠다.

갑자기 신발 속에 모래알이 밟힌다. 아무리 털어내도 빠지지 않는다. 지난 가을 세상을 떠난 S언니에 대한 옛기억이다. 그날 이후 나는 알 수 없는 공포와 슬픔을 삼키며 살았다. 끝내지 못한 애도를 마치려 파주추모공원에 갔다.


언니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 저는 언니가 세상을 떠났던 그 시기, 딱 그 나이가 되었는데 제가 언니처럼 가을까지만 산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세상이 밉고, 마음이 자꾸만 옹졸해지고, 오늘의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너무 오랜만이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는 언니가 맞이하지 못한 2023년을 살고 있는데, 지금 이 고민이 너무 사치스럽나요?'


봉안당 안의 언니의 자리에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사람들과의 순간들로 꾸며져 있었다. 누군가가 사랑이 가장 많이 드리웠던 순간들만 골라서 언니의 마지막 자리를 채워주었다. 마치 나에게 남은 생은 소중한 사람들과 모든 순간을 음미하며 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주어진 오늘을 감사하며 살면 삶의 마지막 순간엔 저절로 행복만 남아있을 거라는 것처럼. 적어도 언니의 자리에선 내가 느끼는 불안, 권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옛 선배에게 뒤늦은 인사를 마치고 봉안당을 나왔다.




지금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소음과 타인의 목소리로 가득한 도시는 안될 것 같다. 이왕 떠날 거 속세를 뜨자! 그렇게 경기도 양주시의 어느 사찰을 찾았다. 그곳엔 각자의 사연을 가진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있었다. 그날 처음 만난 우리들은 한 방에서 몸을 뜨끈히 데우고, 타종을 치며 종소리에 명상을 하고,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며 가지고 온 번뇌 찌꺼기들을 내려놨다. 108배를 올리고 염주를 굴리며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과 욕망들을 관조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그 찌꺼기들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진심으로 삶을 사랑하기를 소망할 수 있었다.

그 소망이 너무나 간절해서 나도 모르게 낯선 향 냄새가 이끄는 법당에 들어갔고, 그날 처음 본 신 앞에서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말이 점점 통하지 않는 친구들을 품을 수 있게 해주세요.

선의를 알아봐주지 않는 사람들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는 무심한 이들에게도 희망을 품게 해주세요.

가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욕망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을 주세요.

그 아이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제발 멈춰주세요. 지금껏 품었던 마음 중 가장 따듯한 부분만 남길게요.

는 사랑을 조금만 주어도 만족하는 사람이니,  그릇에서 흘러 넘친 사랑은 아픈 이들에게 건넬게요.

그러니 어릴 적 소망했던 것처럼 내일을 기대하며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세요.

다시 지을  집과 요새는 분노, 공포, 혐오, 집착이 아니라 용서, 이해, 사랑, 희망으로 짓겠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꽤나 구체적이어서 신이 이해하실까 걱정하며 법당을 나왔다.




노트를 다시 펼쳤다.

프롬 책 속의 문구가 보인다.

아, 그 문구다. 같이 글을 쓰는 어느 이웃이 프롬의 책을 소개할 때 인용했던, 나의 심금을 울렸던 그 문구.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中)'
'요약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은 인식이지만, 또 인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투명하다면 타인의 불투명성은 인간의 가능성 안에서 투명해질 것이다.(<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中)'


프롬은 아무리 세상이 잔혹하게 돌아가더라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내가 삶을 사랑하는 게 잘 안 된다고 투덜거렸던 이유는 타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아버려서 그랬던 건 아닐까.


사찰을 떠나는 날 새벽, 부처님과 앞으로 남은 생에 믿을 신들에게 빌었다.

계속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벅찰 정도로 사랑해서 세상을 구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내 삶이 사랑으로 더 존재하게 해달라고. 사랑받기만을 기다리며 두리번거리지 않겠다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다고.(2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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