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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Be kind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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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Mar 11. 2024

길 잃은 할머니

우리가 애써 친절해야 할 이유

모처럼 이른 퇴근을 했다. 평소보다 두 시간은 일찍 일어나 새벽 출근을 했으니 한창 졸릴 터였다. 머릿속엔 집에 가자마자 낮잠을 잘 생각뿐이었다. 오후 세시였다. 지하철은 한산할 시간이었다. 용산역에서 문산행 열차를 탔다. 자리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손에 잡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봤다. 하는 일마다 족족 풀리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나를 괴롭히는 일들이 찾아왔던 지난겨울. 나는 유투브 음성에 의지한 채 무력하게 휴대폰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지하철 좌석의 온기에 녹아 유투브 음성이 흐릿해지며 나른해졌던 그 순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려왔다.

"어르신. 이 열차가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가셔야 해요. 이건 문산 가는 열차예요."

맞은편의 승객이 나와 같은 라인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향해 말했다. 할머니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렸다.

"할머니. 집이 어디신데요? 퇴계원이요? 그럼 이 열차 타시면 안 돼요. 내려서 반대로 타세요."

"아냐. 이 열차가 맞아. 문산 지나서 퇴계원 가잖아."

"아니에요, 할머니!"

옆자리 승객도 답답했는지 할머니를 향해 말했다.

"그럼 아가씬 어디 가는데?"

"전 파주요! 이 열차는 파주 가는 열차예요. 할머니는 남양주로 가셔야 하잖아요. 이거 타면 완전히 반대방향이에요. 집으로 다시 가는데 두세 시간은 걸려요."

"저 어르신 치매인가 봐. 아이고 어째. 내가 용산에서 타기 전부터 계셨는데. 한참을 잘못 타고 왔어."

맞은편의 승객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할머니. 자제분 안 계세요? 전화 한 번 해보시는 게 어때요? 같이 집으로 가셔야죠."

"있긴 한데 전화해봤자 뭐 해. 어차피 여기까지 못 와."

"가족분들은요? 같이 사는 가족 분 안 계세요?"

"..."

"아이고. 어쩌면 좋아."

할머니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거 같았다.


"할머니... 여기로 가시면 안 돼요. 지금 고양시까지 왔잖아요. 남양주로 가셔야죠."

옆자리 승객은 열차가 달리는 내내 말했지만, 할머니는 눈만 껌뻑거리며 문산을 지나야 퇴계원을 간다고만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다른 승객이 할머니와의 실랑이를 지켜보다가 신고를 했고, 열차는 고양시의 어느 역에 정차했다. 신고를 받고 세 명의 역무원은 문이 열리자마자 열차에 탑승했다.

"어르신. 집이 어디세요? 저희가 모셔다 드릴게요." 

큰 키의 역무원이 할머니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몸을 낮추며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역에서 일하는 직원이에요.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그제야 할머니는 좌석 옆 철봉을 힘겹게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했다. 비어있는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힘겹게 끌며 역무원의 손을 잡고 나갔는데, 어쩌면 할머니는 본인이 열차를 잘못 탄 걸 알았지만 누군가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역무원의 도움으로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풍경은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하다. 본인을 도와주러 온 역무원을 바라보던 할머니의 눈빛이 계속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눈빛엔 낯섦, 당황, 무력감이 보였다.


그날 내가 열차 안에서 본 광경은 미래의 어느 순간 약해지고 무력해지고 기억마저 잃은 나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점점 노쇄해지며 매일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다. 생기를 잃고, 체력을 잃고, 주변 사람들을 잃고, 지난날의 기억 또한 잊을 것이다. 내가 지금 길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릴 수 없고누군가의 손을 잡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래서 우리는 늘 친절해야 한다. 무력하고 약한 타인의 존재를 알아차려야 한다.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가야 하는 거라 하지만, 우리는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살 수 없다. 혼자의 힘으로만 잘 살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우린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기대고 있고 빚지고 있다. 우린 의지해야 한다. 타인의 눈길이, 관심이, 곁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늘 친절해야 한다. 주변엔 나의 친절한 시선을 필요로 하는 타인이 있고, 나도 반드시 타인의 친절을 꼭 필요로 할 테니까. 그래야 기억을 잃더라도 서로의 친절함에 기대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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