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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Mar 04. 2024

시 낭독하는 버스기사

버스 안에서 발견한 행복의 비밀

남쪽은 분명 따뜻할 줄 알았다. 숏패딩을 입고 바닷가를 거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포항까지 내려왔는데 이곳은 얼음장이었다. 바닷가의 강풍은 얼굴을 할퀴며 불어댔다. 포항 바다를 보며 잠시 머리를 비우려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바다 풍경이 아닌 매서운 강풍을 맞을 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니까.


지난 1월, 포항에 있던 3일 내내 길고 무거운 롱패딩을 입고 다녔다. 수족냉증이 심한 나는 옷을 아무리 두껍고 무겁게 입어도 손끝은 당장 마디가 끊어질 듯 얼어붙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도 여전히 추웠다. 나는 포항에 사는 불교대학 선생님을 만나러 영일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죽도시장 근처에 있던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무거운 여행가방을 멘 채 마을버스에 탑승했다. 밟히지 않도록 롱패딩을 살짝 걷어올리며 버스 계단에 올랐고, 뒤이어 할머니들도 시장바구니를 끌고 버스에 올라탔다.


"아이고. 어서 올라오세요. 밖에 엄청나게 춥죠?"

인사소리가 유난히 컸다. 헤드셋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는 기사님은 승객 한분 한분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기사님 바로 뒷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마자 무거운 가방부터 내려놨다.


"어머니. 오늘 시장에 좋은 게 별로 없었나 보네요. 빈 바구니로 오셨네."

아는 사이인가? 승객들이 줄줄이 버스에 오르는 틈에 기사님은 할머니들의 시장바구니에 시선을 둔 모양이다. 나는 얼른 찬 바람이 들어오는 버스 문을 닫고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죽도시장에서 승객들을 실은 버스는 드디어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고요하고 차가웠던 버스 안에는 기사님의 시 낭독소리가 퍼졌다.

"꽃. 김 춘 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갑자기 라디오DJ라도 된 듯 기사님은 말을 이어나갔다.


"김춘수의 꽃, 참 유명한 시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니. 여러분의 인생에도 꽃과 같은 의미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참 잘 산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사님이 시에 관한 소감을 마치자 승객들은 박수를 쳤다.

이 버스는 도대체 뭐지? 나는 낯선 분위기에 민망해졌다. 승객들의 반응에 힘입은 기사님은 다음 시를 낭독했다.


"동행. 이 정 하. 돌이켜보면 나는 늘 혼자였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 기대도 싶은 때/ 그의 어깨는 비어 있지 않았으며/ 잡아줄 손이 절실히 필요할 땐/ 그는 저만치서/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 그래, 산다는 것은 결국/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틀거리고 더듬거리더라도/ 혼자서 걸어 가야하는 것이다// 들어선 길 이상 멈출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그 외길 //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아아, 그것처럼/ 내 삶에 절실한 것은 없다"


이어서 기사님은 친구도, 가족도 함께 하는 것 같아도 결국 인생은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소감을 남겼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시를 낭독하는 기사님을 봤을 땐 꼭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닐 때 봤던 경상도 출신의 목사님 같았다. 본인 스스로가 라디오가 되어 시를 외우고 용감하게 승객들 앞에서 낭독하는 기사님. 나는 백미러에 살짝 비친 기사님의 얼굴을 봤다. 기사님은 KF94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눈 밑으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이어갈 때 기사님의 눈은 활짝 웃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본인이 가장 행복하다는 표정이었다. 마스크 속에 가려진 입도 분명 큰 미소를 짓고 있었을 거다. 아. 그는 행복하게 일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행복을 만들어 낼 줄 알고, 심지어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도 기꺼이 건넬 줄 아는 사람이다. 두 번째 시 <동행>을 들었을 땐 <꽃>을 들었을 때의 민망함이 아닌 감동이 끌어 올랐다. 두 번째 시 낭독이 끝나자마자 나는 다른 승객들보다 먼저 박수를 쳤다. 얼어붙었던 두 손은 벌써 따뜻하게 녹아있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십쇼. 조심히 가세요."


신기한 광경이었다. 영일대로 가던 10분 남짓한 버스 안에서 웃음이 활짝 피어올랐다. 그날 기사님은 나를 영일대가 아니라 행복으로 가는 여정을 안내해 줬다. 행복은 어떤 목표를 달성하거나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얻는 게 아니다.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다.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여정 곳곳에서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포항의 마을버스가 나에게 불쑥 나타난 행복이었고, 그곳에서 행복의 비밀을 발견했다. 그렇게 얻은 행복들은 달아나지 않았다. 전국적인 한파로 KTX고속열차마저 지연운행을 했던 1월. 이상하게도 그날 바라본 영일대는 따뜻했다. 해변의 윤슬은 눈을 찢을 듯이 반짝거렸고, 반짝임들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날 휘발되지 않은 행복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다.


기사님은 오늘도 버스에서 행복을 피워내기 위해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운율을 가진 시를 열심히 고르고, 그 시를 몇 번이고 읊고 외워서 승객들에게 들려주는 일들이 여전히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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