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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Be kind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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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Feb 26. 2024

프롤로그: Please, be kind

 상사는 나에게 비겁하다고 했다. 앞으로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계속 다른 직장과 저울질 하며 옮겨 다닐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럴 거라고 했다. 한 시간이 넘게 상사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며 사직원에 겨우 서명을 받아냈다. 그는 나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라는 말 한 마디 조차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직장 사람들은 나를 피했다.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직원 고충상담방과 노사위원회가 있었지만 아무도 나에게 소개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버티다 못 견디면 알아서 퇴사할 일개 계약직 직원에 불과했다. 시한폭탄 같은 TF팀의 직원과 엮여 봤자 그들에겐 좋을 게 없었다.


 마지막 날 밤 10시까지 혼자서 사무실에 남아 인수인계 업무를 마무리했다. 먹지 못한 저녁을 뒤늦게 해결하려 집 근처에 문을 연 가게를 찾아다녔다. 분식집도, 좋아하던 호두과자 집도, 자주 가던 토스트 집도 모두 문을 닫았다. 다들 힘겨웠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나는 허기를 해결하기 전까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 멀리서 불빛과 연기가 보였다. 만두집이었다. 사장님은 가게 안에서 정리를 하다가 밖에서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하곤 문을 열고 나오셨다. 열기가 가득한 큰 찜기의 뚜껑이 열렸다. 왕만두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사장님은 내가 늘 먹던 김치왕만두를 포장한 후 뜨끈한 봉지를 건네주었다. 서럽고 쓸쓸했던 하루 중 가장 따뜻했던 순간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눈에선 자꾸만 뜨거운 습기가 올라왔다. 무너지지 않도록 부여잡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사장님이 마지막 왕만두를 팔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착각하기로 했다. 엉망진창이었던 세 번째 직장을 마무리한 지난가을밤, 스산하고 쌀쌀한 마음속에 온기가 힘겹게 피어올랐다.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날들은 계속 이어지고, 모든 것이 의미 없고 허무한 순간은 자주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장님의 만두통 찜기 같은 온기가 절실해진다. 차갑고 공허한 마음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때 나는 상자 속 온기를 꺼낸다. 사실 우리 주변에, 우리 삶 곳곳에 온기가 존재한다.


 나는 오늘, 내일 아플 나를 위해서, 그리고 오늘, 내일 아파하고 있는 당신을 위해 온기가 피어오른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고이 보물상자 안에 모아두었다. 우리가 통과하는 시간 속에 살아 숨쉬기 위해선 서로의 온기가, 사랑이 필요하다. 괴로움과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모아 놓은 사랑을 꺼내자. 그리고 결코 이 시간이 아쉽지 않도록 서로 애써 미소 짓자. 다정함을 잃지 말자.

Please, be kind. Especially when we don't know what's going on(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을 땐 서로를 친절하게 대해야 해요).
-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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