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 꿈이 나를 데리고 간 곳
"살려주세요!"
나는 군중들 속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위험에 처해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제발요! 저 좀 도와주세요!"
수많은 얼굴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봤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차가운 표정을 짓곤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제발 나 좀 구해주세요..."
아무도 돕지 않고,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싸늘한 무관심에 더 겁을 먹고 목청껏 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궁궐인지, 사찰인지 모를 어느 큰 전통 목조 건물 터에 있었다. 지나가던 스님이 나를 데려왔고, 이곳에서 당분간 지내라는 말을 남겼다.
안도의 한숨을 뱉기도 전에 꿈에서 깨어났다. 집이 춥고 스산했다. 목은 건조하고 칼칼했다. 10월 말인데 벌써 아침 기온이 0도에 가까웠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계절 감각이 나를 2년 전 가을, 겨울로 데려다 놓았다. 나의 일, 관계, 그리고 호주머니까지 탈탈 털어갔던 그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재수가 없었던 그 시간을 나는 이제 '귀신이 붙은 시기'라 부른다. 내가 하던 모든 일을 방해하고 나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려던 그 해.
정신을 차리고 출근을 했지만 오전 근무 내내 그 꿈이 나를 붙잡고 있는 거 같았다. 2년 전에 느꼈던 파괴적인 우울감이 내 평화로운 일상을 잠식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나는 지금 내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점심을 빠르게 먹고 회사 근처에 있는 매봉산에 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꽃과, 풀과, 나무의 변화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겠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숨이 찰 때까지 뛰어올랐다. 오르막길만 골라 뛰어올랐고, 구역질이 날 때까지 계속 뛰었다.
마침내 매봉산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고, 깊은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숨과 함께 새벽부터 오전 내내 달라붙어있던 불길한 꿈이 같이 떨어져 나갔다. 이젠 어떠한 힘도 발휘 못할, 발휘해서는 안될 그깟 무의식 속 부정적 경험은 더 이상 내 일상 위로 올라올 수 없었다. 고맙게도 내가 하필 약해질 뻔한 날 가을볕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악몽을 꾸고 난 이후로 잠자리에 어느 때보다 신경 썼다. 퇴근 후엔 반드시 운동을 하며 남은 에너지를 모두 끌어다 썼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높였고, 잠옷은 더 두꺼운 재질로 바꿨다. 깨끗하게 씻고, 베개 주변을 가지런히 정리한 뒤 잠이 들었다.
분명히 같은 주간이었는데 이전의 꿈과는 차원이 다른 꿈이었다. 마치 다른 생을 꾸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지역에 있는 독립서점에 가기 위해 마을버스를 타고 어느 정거장에 내렸다. 서점 안으로 들어왔는데, 인터넷에서 알아본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책이 아니라 LP를 팔고 있었고, 공간은 꽤나 넓었다. 평화로운 재즈 피아노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손님은 없었고, 나와 가게 사장님만 있었다.
나는 음료를 주문하고 픽업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픽업대 한켠이 눈에 들어왔다. 쌓아놓은 황색 티슈가 널브러져 있었고, 곳곳에 과자 부스러기와 엎질러진 음료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티슈를 다시 차곡차곡 쌓았고, 과자 부스러기와 음료 얼룩은 행주로 닦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사장님이 말했다.
"별건 아니고요. 너무 감사해서요."
가게 사장님은 또 다른 음료를 한잔 더 내밀었고, LP 한 장과 LP에 담김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정성스럽게 손으로 적고,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 그림을 잔뜩 그려주셨다.
'아니... 독립서점에다가 손님도 없는데... 나한테 이렇게 퍼 주면 뭐가 남는 거지..? 난 그냥 지저분한 픽업대를 닦았을 뿐인데...'
나는 몹시 어리둥절했지만 사장님이 건넨 그 선물을 받았다.
"밖에 자리가 더 좋아요. 한번 나가보세요."
나는 테라스 자리로 가기 위해 통창으로 된 출입문을 열었다. 날은 흐렸고, 미스트처럼 얇은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보다가 내 시선은 테라스 바깥 풍경에 머물렀다. 이곳은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책방 바로 옆에는 드넓은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파도가 바위를 거침없이 때리고 있었다. 그 풍경은 얼마 전 포항 여행을 갔을 때 곤륜산에서 내려다 본 동해바다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많은 손님들이 가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올려보니 이 책방은 2층으로 된 건물이 되어있었다. 유명하고 사랑받는 가게라서 게스트하우스도 같이 운영한다고 했다. 이곳은 손님 없는 그저 그런 LP가게가 아니었다.
사장님은 나갈 때 우리 가게의 기념 책갈피를 꼭 챙겨가라고 하셨다. 나는 작은 바구니에 든 여러 책갈피를 고르고 고르며 가장 마음에 드는 것 두 개를 챙겨서 호주머니에 넣었더니 꿈에서 깨어났다.
10월 말에 갑작스럽게 새벽 기온이 떨어지며 나를 가장 아픈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면서 자는 동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좋은 곳을 여행했고, 그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온도와 습도 같은 계절 감각이 나를 어느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면 나는 어디로 갈까? 몸과 마음이 쉽게 얼어붙는 계절이어도 꼭 아픈 기억으로 갈 거란 보장은 없다. 나는 얼음장 같은 추위 속에서도 반짝이는 추억을 쌓으며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으니까.
가을이 물러가고 겨울이 자리를 잡으면 밤마다 꿈 여행을 하고 싶은 장면들이 참 많다.
대학교 동아리 시절 겨울 전수를 가서 후배, 동기, 선배들과 흰 눈을 펑펑 맞으며 판굿을 쳤던 그 순간으로 가보고 싶다. 나는 건조한 손이 찢어진 줄도 모르고 신나게 장구를 쳤고, 내 앞에 있던 후배는 "좋다!"하며 나와 눈을 마주치며 추임새를 건넸다.
조금 더 멀리 중국 쑤저우로도 가보고 싶다. 쑤저우에서 반년 간의 짧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던 그날, 외국인기숙사에서 두 개의 캐리어를 혼자 끙끙거리며 캠퍼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좀처럼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는 쑤저우에 첫눈이 내렸고 마치 나에게 작별인사와 앞으로의 여정에 큰 응원을 하듯 하얀 카펫을 깔아줬다.
아, 그날도 좋다.
최악의 가을, 겨울을 보냈던 2년 전 살기 위해 아등바등 일상을 버티던 그 시절로 말이다. 간밤에 악몽을 꾸고 정신을 차리러 수영장 오픈 시간에 맞춰 짐을 챙겨 나갔던 그날. 아침부터 폭설이 내려서 세상이 온통 하얀 솜덩이에 잠겨 있었던 그날. 하얀 세상에 마음을 뺏긴 나머지 간밤에 꾼 꿈이 악몽인 줄도 모르고 눈을 맞으며 혼자 동화 속 주인공인양 걸어온 눈길 위에 찍힌 발자국을 뿌듯하게 지녀봤던 그날로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