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가장이 모든 것을 잃고 발견한 회복과 사랑의 로드맵
11월, 런던의 늦은 오후 햇살은 하이드 파크의 토요일 상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40대의 나는 삶의 정점에서 다음 단계를 계획하며 거리로 나와 하이드 파크 쪽으로 걸었다. 간밤에 영국인들과 맥줏집에서 과음한 탓인지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출장 때마다 찾는 작은 호텔에 머물렀다. 영국에서의 비즈니스 미팅은 성공적이었다.
벼룩시장을 구경 삼아 걸었지만, 마음은 이미 한국에 가 있었다. 수많은 물건 중 내 발을 붙잡은 것은 골동품 노점의 작은 코너였다. 미니 벽시계 하나와 기계 부품으로 만든 액자와 영국 시골 풍경이 그려진 유화 미니 액자였다. 시계의 추가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나는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가격표대로 계산하고 세 가지 물건을 샀다.
팔목에 찬 시계는 이제 막 시작될 나의 새로운 시간을 축하하는 기념품처럼 느껴졌다. '이 시계가 멈추는 일은 없을 거야. 앞으로의 20년은 이 황금빛 시간처럼 흘러가겠지.' 그 순간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시계가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세상의 모든 절망과 혼돈에 대비되는 마지막 프레임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미 강남의 큰손 회장님이 나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발행하는 당좌수표는 누구에게 발행하든지, 최종적으로는 그 회장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회장님이 이제 그만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내 수표는 그저 종이에 불과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 나는 박 사장과 함께 회장님과 약속을 하고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실 우리 같은 사람은 만날 수 없는 분이었지만, 다급해서 만난 것이다.
"김매곤 사장은 이제 힘든데…." 회전의자에 앉은 회장은 조용히 나를 보며 한 마디 던졌다. 회장의 얼굴은 눈이 날카로우면서도 체격은 깡말랐다. 살짝 눈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이 징그럽게 보였다.
”젠장, 남의 피를 빨라 처먹고 사는 인간이란……. “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 사장이 나서서 사정했고, 회장은 서랍을 열어 내가 발행한 수표를 보여주었다. 나는 속으로 무서움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발행한 수표가 회장 손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사업상 거래처에 발행하면 그 수표가 돌고 돌아 강남의 큰 손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눈으로 본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그를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럼 딱 한 번이야. 알겠지?" 회장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당신 사업이 잘되어야 나도 좋은 일이니 꼭 성공하라고." 나는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이렇게 딱 한 번의 유예를 얻었지만, 그 시한이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11월 말의 런던은 구름이 낮게 깔려 음울했고, 코끝이 시린 추위가 온몸을 감쌌다. 나는 호텔에 부탁하여 늦은 저녁 한국으로 전화를 연결했다. 휴대폰 통신비가 엄청나게 나올 것을 염려하면서도, 절박했다.
"여보세요, 여기 김매균입니다."
여직원이 바로 눈치를 채고 사장을 바꿔주었다. "김매균 씨, 오늘 돌아온 어음은 어떻게 할까요?" 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오늘 돌아온 당좌수표 1,200만 원짜리를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사장님, 한 번만 더 돌려주시면 내일 한국으로 가는데, 가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박 사장이 가지고 있는 수표 외에도 다른 사장에게 발행한 수표 1천만 원짜리가 한 장 더 있었기 때문에, 수표를 돌려서 자금을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멍하니 걷다가 시계탑(빅벤)의 묵직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그 웅장한 소리가 내게는 파산을 알리는 최후의 심판처럼 느껴졌다. 거리에는 벌써 크리스마스트리가 불을 밝히기 시작했고, 성탄절 특유의 들뜬 분위기가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저 붉은 이층 버스들, 빨간 우체통마저도, 곧 나를 덮칠 재앙과는 상관없이 평화로웠다. 나는 잠시라도 이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허름한 맥줏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내부는 뿌연 연기로 가득했지만, 작은 무대에서는 옅은 조명 아래 여자 가수가 라이브로 캐럴을 부르고 있었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노엘, 노엘(Noel, Noel)" 선율이 절망감을 증폭시켰다.
사실 가고 싶지 않았다. 도피하고 싶었지만, 가족이 한국에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구름 낀 런던을 떠나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만이 실패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책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