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열매 따먹고, 물고기 잡아먹고, 닭 잡아먹고 살면 돼요
양심의 가시를 뽑다.
이 문제를 두고 아내와 약 두 달간 엎드려 기도했다. 캄보디아의 뜨거운 밤공기 속에서 우리 부부의 기도는 늘 무거웠다. 쓰롤란 교회에서 계속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 아니, 오히려 성령을 욕되게 하는 기만행위는 아닐까 하는 확신에 가까운 의구심이 나를 괴롭혔다.
1년에 네 번, 한국의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선교 편지를 쓸 때마다 양심의 가시가 돋아났다. '진정한' 예배의 소식이라며 북적이는 아이들의 사진을 담아 보낼 때면, 그 허구의 풍경 뒤에 숨은 진실 때문에 펜을 든 손이 떨렸다. 결국 나는 이 잘못된 사역의 형태를 바로잡고 선교의 본질을 되찾기로 결단했다. 2020년 9월, 사역자의 딸에게 정식으로 대면 만남을 요청했다.
만나기로 한 날, 사역자의 딸 '쓰레이 네악'은 여전히 약속 시간을 우습게 여겼다. 오후 2시 약속이었지만 그녀는 30분이 지나서야 느릿느릿 나타났다. 한국 선교사와 무려 7년을 함께 사역했고 한국 땅까지 밟아본 사람이라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었다. 그 무례한 태도를 보며 나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이 관계의 끝을 예감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정중하게 입을 뗐다. "쓰레이 네악, 지금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확산하면서 한국의 후원 교회들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매월 보내드리는 사역비가 조금 줄어들 수도 있을 것 같아 미리 상의하려고 불렀습니다."
당시 우리는 주일 간식비, 사역비, 생활비 명목으로 그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지원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선교비 감축 가능성을 전하며, 그동안 지적해왔던 '다른 교회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문제'를 다시 한번 언급했다. 그러자 그녀의 태도가 돌변했다. 마스크를 쓴 채 의자 뒤로 몸을 깊숙이 기대더니 팔짱을 끼고는 나를 똑바로 쏘아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돈이 없으면 못 살겠지만, 우리는 괜찮아요. 우린 그냥 열매 따 먹고, 닭 잡아먹고, 강에서 물고기 잡아먹으며 살면 되니까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맞은 듯한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그동안의 헌신과 사랑이 단숨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충격 속에서 다시 한번 뼈아픈 진리를 깨달았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복음의 심부름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돈을 앞세운 사역은 결국 현지인을 자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에게 발붙어 사는 '기생적 사역'으로 변질시키고 만다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오토바이 위에서 나는 눈물을 삼켰다.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더는 그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 같고, 후원자들을 속이는 것 같아 양심이 너무 저립니다."
우리는 아픈 이별을 결단했다. 그해 12월 성탄절 예배를 마지막으로, 1년이 채 되지 않은 쓰롤란 교회와의 사역을 정리하기로 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돌보았지만, 그들에게 선교사는 그저 매월 더 많은 물품과 물질을 짜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교회를 방패 삼아 선교비로 생활을 영위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하나님께 엎드려 울었다.
주변의 어떤 선교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선교사님, 우리도 여러 곳에서 아이들을 차로 태우고 와요. 캄보디아 사역은 원래 다 그렇게들 합니다.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마세요."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자기 교회 아이들이 집이 멀어 차로 수송하는 것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노력이지만, 다른 교회의 아이들을 '동원'해와서 머릿수를 채우고 간식을 나누어 주는 것은 전도의 본질이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가난한 나라일수록 이런 기생적인 현지인 교회가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올바르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물질로 사람을 모으고 있는가?"라는 선교의 본질적인 질문에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건강한 선교의 원칙을 바로 세우기 위해 나는 사역을 내려놓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물질과 물품을 타내기 위해 드려지는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쓰라린 실패를 뒤로하고, 다시 광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