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한 사람을 위한 작은 멈춤

한 영혼의 소중함

by 임래청
한 사람을 위한 작은 멈춤

씨엠립은 세계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가 있는 화려한 관광 도시다. 코로나 이전에는 연간 수백만 명이 찾던 곳이지만, 화려한 유적지 너머 주요 길목에는 여전히 작은 기념품이나 과일을 파는 아이들이 가득하다. 캄보디아 학교는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운영되기에, 수업이 없는 시간 아이들은 연필 대신 용안 바구니를 들고 생활 전선으로 내몰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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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하나 사주세요.” 서툰 한국말로 애원하며 1달러를 외치는 아이들. 한 명에게 사주면 우르르 몰려오는 아이들 때문에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애써 외면하며 지나치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중 매일 마트로 가는 길목에서 용안을 파는 열 살 남짓한 소녀를 발견했다. 유난히 눈이 크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어여쁜 아이였다. 두 달간 매일 스쳐 지나던 어느 날, 나는 마침내 그 아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멈춤에서 시작되었다.

성경 속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만히 묵상해 보면, 주님의 사역은 언제나 멈춤에서 시작되었다. 수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여리고를 지나시던 예수님은 눈먼 바디매오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추셨고(마가복음 10:49),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바삐 가시던 중에도 옷자락을 만진 혈루증 여인을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그녀의 믿음을 확인하셨다. 주님께는 수천 명의 군중보다 눈앞의 소외된 한 영혼이 더 소중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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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그 주님의 발걸음을 닮고 싶은 마음이다. 경계하는 눈빛의 소녀에게 용안을 사고, 미리 준비한 카스텔라 빵을 건넸다. 처음엔 망설이던 아이의 작은 손에 빵 봉지가 쥐어지자, 수줍고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어꾼 쯔라은(고맙습니다).” 거대한 도시의 무관심 속에 갇혀 있던 작은 영혼이 환하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거대한 운동이나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소외된 이들의 이웃이 되어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한 사람의 아픔 앞에 가던 길을 멈추는 사랑의 지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36-37)


주님의 이 준엄한 말씀은 캄보디아 땅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사역의 본질이었다. 그 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느리고 조용한 걸음을 따라 우리 교회에 온 ‘쏙(Sok)’을 만났다. 부모님이 돈을 벌려고 멀리 떠나고 1년에 한두 번 왔다가는 부모를 대신해서 할머니와 외롭게 살던 쏙. 상처 입은 그 아이의 곁에서 나는 그가 다시 진심으로 웃을 수 있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


속도와 성과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 작은 기다림과 멈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캄보디아 땅에 심으라고 하신 가장 소중한 사랑의 씨앗임을 믿는다. 한 영혼을 향한 멈춤은 결코 지체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늘 소망이 싹트는 가장 복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