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오지 않는 면회, 가장 깊은 사랑

사랑하기에 보러 오지 않는 사랑

by 임래청
인생의 시계: 후회 없는 세상을 향한 다짐

가족들과 교인들이 보고 싶었고, 특히 목사님의 설교가 그리웠다. 가끔 꿈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그 감동 속에서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차가운 창살을 잡고 운동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의 꿈을 그렸다. 아무리 이곳에 오래 있다 해도 10개월이었다. 그래서 계절만 한 번씩 지나가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구체적인 희망을 품고 살아갔다. 내가 이곳에 잡혀 들어온 때가 11월 중순이었으니, 길어야 다음 해 9월 또는 10월에 집으로 갈 것이라고 스스로 기한을 정하고 기다렸다.


그동안 살아왔던 일들을 회상했다. 초등학교 때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부산으로 갔던 일, 부산에서 약 1년간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 하면서 친구들의 놀림에 어린 나이지만 화가 많이 났었던 일들이 선명했다. 고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친구가 술을 많이 먹어서인지 위암으로 31살에 세상을 떠났고, 중학교 때 제일 친하게 지냈던 훈이가 교통사고로 45살에 세상을 떠나버린 일들을 떠 올렸다.


인생은 이렇게 덧없이 이 세상을 떠나는데,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이라는 존재가 우리를 부르면 아무 말 없이 가야 하는 곳이기에, 그 세계가 궁금했다. 사람들은 별이 되었다고도 하고 달이 되었다고도 하지만, 그 말은 우리들의 위로일 뿐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세상에 나가게 된다면 후회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며 살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면서 하루를 마치고 잠이 들곤 하였다.


옥중서신과 아내의 사랑

처음 수용자들이 들어오면 한결같이 이름도 모르는 판사에게 반성한다는 글을 쓰면서도 꼭 '억울하다'라는 변명과 호소를 덧붙인 편지를 썼다. 하지만 내가 펜을 드는 이유는 전혀 달랐다. 나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와 구치소 내의 일상에 대한 글을 매일 썼다. 아내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일은 종이 한 장을 통하는 편지뿐이었다. 편지는 사전에 교도관들의 엄격한 검열을 받기 때문에, '늘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 외에 구치소 생활의 비참함이나 자세한 속사정을 쓸 수가 없었다.


난 당신과 꼭 파리의 세느 강변에 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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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편지를 쓸 때만큼은 감옥도 나의 영혼은 가두지 못했다. 우리는 종이 위에서 과거로 돌아가 마음껏 연애했고, 편지 속에서나마 멀리 유럽의 풍경을 상상하며 웃을 수 있었다. 구치소의 차가운 벽돌과 쇠창살은 사라지고, 대신 포근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사랑하는 여보, 세끼 손가락! 당신과 파리에 가서 꼭 두 손을 잡고 세느 강변을 거닐 거야, 당신 나 믿지?" 이렇게 속삭이며 연인의 밀어(蜜語)를 담아 편지를 보냈다. 이 짧고 은밀한 약속은 현실의 절망을 잊게 해주는 강력한 최면이었다. 나는 구치소 생활을 하면서 약 40통의 편지를 발송했고, 아내의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 영혼이 매달리는 유일한 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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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내가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교회 담임목사 사모님이 함께 면회 가자고 권유해도 아내는 단호했다. "그냥 하나님께 기도만 하고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오지 않았다. 그녀는 서로 얼굴을 보면 5분간의 짧은 만남 후 남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뿐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내는 매일 면회를 오고 싶었지만, 수의복을 입고 있는 나의 초라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의복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나의 사회적 지위와 자유가 박탈당했음을 상징하는 절망 그 자체였다.


아내는 차라리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서로 더 애틋한 사랑의 끈을 이어주는 유일한 일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면회 와서 철장 너머로 서로 손잡고 울면 뭐하겠는가? 현실만 더 비참해지고, 남아있는 가족들의 마음만 더 아플 것이다. 아내의 '오지 않는 면회'는 곧 나에 대한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이자, 그녀의 고통스러운 희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