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걸하는 손이 아닌 찬양하는 손
텅 빈 예배당에서 흐른 눈물
지금은 제법 활기가 넘치지만, 사실 처음 교회를 맡았을 때는 리더 12명과 서너 명의 중등부 학생이 전부였다. 어떤 주일은 청소년들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아, 나는 차갑게 식어버린 텅 빈 예배당에 홀로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그 눈물은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한탄이었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지 못한다는 자책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리더들을 불러 "왜 학생들이 예배에 나오지 않는 것 같니?"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그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는 몰라요"라고 무심하게 답할 뿐이었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편 126:5)라고 약속하셨다. 나는 더 이상 리더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로 작정하고 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전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주님은 내게 ‘못자리판의 지혜’를 깨닫게 하셨다. 한국의 5월, 본격적인 모내기 철이 되면 농부들은 모판에 모를 심어 금지옥엽 키운다. 싹이 튼튼하게 자라나야 비로소 넓은 논에 옮겨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보잘것없는 가정집 교회가 장차 캄보디아라는 거대한 논에 옮겨 심어질 귀한 영혼들이 자라나는 영적 ‘못자리판’임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주일마다 우왕좌왕하던 리더 호안과 소피읍에게 분반을 하여 담임제로 맡겼다.
"목사님, 저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당황해하는 그들에게 나는 웃으며 힘주어 말했다. "호안, 소피읍! 너희는 충분히 할 수 있어. 내가 너희를 믿어줄게. 지금부터 출석만 체크하고 일주일 동안 지냈던 이야기를 서로 하면 된단다.“
가라지를 품는 분별력 있는 사랑
이제 리더들은 단순한 봉사자를 넘어 교사가 되어 어린아이들을 정성껏 돌본다.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툴기만 했던 그들이,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흐르자 어느덧 책임감과 자립심을 갖춘 성숙한 리더로 변모해 갔다. 덕분에 청소년 예배는 이제 30~40명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오른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눈에 보이는 숫자로 부흥시키는 외적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의 간절한 소망은 오직 하나, 이 영혼들이 척박한 토양을 뚫고 건강하게 자라나 주님의 진정한 성도로 우뚝 서는 것이다.
주님은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태복음 13:29)고 말씀하셨다. 우리 부부 역시 이 아이들 틈에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내 눈에 거슬린다고 가라지를 뽑아버리려 들면, 그 곁에서 가냘프게 숨 쉬는 연약한 알곡마저 상처를 입고 말라 죽을 수 있다. 그렇기에 섣부른 판단을 멈추고, 오직 주님만이 알곡과 가라지를 온전히 구별하실 것을 믿으며 인내와 사랑으로 지켜보는 늙은 농부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목회자로서의 영적 분별력까지 내려놓았다는 뜻은 아니다. 무작정 베푸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선교사 자신의 만족을 위한 자기위안이나 상상병일지도 모른다. 선교지에서 이런 맹목적이고 기복적인 사랑만 먹고 자라는 가라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생명력 없는 들풀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사랑도 때로는 아프게 분별해야 한다.
거지로 만들지 마세요
2년 전,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한 현지 전도사와 카페에서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나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목사님, 한국에서 단기 선교팀이 오면 제가 통역을 할 때가 많은데, 어떤 마을에 가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우리 캄보디아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보여주고 선물을 나눠주지요. 정말 식량이 필요한 가정도 있지만, 이제는 단기팀이 온다는 소식만 들리면 더 불쌍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우리 이웃들을 보면 통역을 하면서도 화가 납니다. 미안하지만, 선교사들이 우리 민족을 거지가 되게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아요. 목사님은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의 말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나는 그의 거친 손등을 어루만지며 “그렇군요, 정말 미안해요”라고 사과 아닌 사과를 했지만, 그날 이후 그 전도사의 일침은 내 사역의 이정표가 되었다. 선교사의 진짜 역할은 현지인들이 스스로 예배의 주체가 되어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혹여나 선교사 스스로가 성과에 눈이 멀어 가라지를 키우고, 가룟 유다를 양산하면서 교회의 덩치만 키우려 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뒤돌아보아야 한다. 자립 의지를 꺾는 동정은 독(毒)이 될 뿐이다.
지금 우리 부부는 못자리판에서 잘 자란 벼를 넓은 논으로 옮겨 심는 과정을 겪고 있다. 때로는 마음이 아프고 힘들지만, 이것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진통이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은 리더들은 하나님 안에서 더 깊은 꿈을 꾸며 단단하게 연합한다. 낡은 기타 반주에 맞춰 목청껏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비로소 가식의 껍데기를 깨고 나온 진실한 예배의 자유를 본다.
디모데교회라는 이 작은 공동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선명하게 증명되는 축복의 자리임을 확신한다. 비록 화려하지 않아도, 구걸하는 손이 아니라 찬양하는 손을 높이 든 이 아이들과 함께, 나는 오늘도 기쁨으로 이 영적 못자리판을 일구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