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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끝, 다시 일상으로

동해안 자전거 국토종주

by 림스

자전거 여행 마지막 날이니 걱정 없이 술을 들이켰다. 바다에 어둠이 깔리고, 술이 들어가자 우리 각자 개인적인 자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술자리의 대화란 것이 그렇듯 주제가 휙휙 바뀌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둘을 잘 알고 있기에 전화를 하신 것 같다. 내 아이폰을 대호에게 주고 전화를 받으라고 손짓했다.


"예! 아버님!"


대호는 한동안 통화를 하고 준섭을 바꿔줬다. 준섭도 아버지와 통화를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나와 짧게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너희랑 만난다고만 하면 꼭 전화를 하셔..."


"그래도 전화 올 아버지가 있는 게 어디냐." 대호가 말을 했고, 이어 준섭도

"그니깐. 우린 그런 전화 못 받는다야"라며 이어갔다.

"야야...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냐..."라고 말을 했다. 그들의 말속에 메마른 슬픔이 깃들어져 있었다.


대호는 스무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어릴 적에 집을 나가시고, 다 커서 온 연락이 위급하다는 연락이었다. 지방에 있는 대호는 새벽에 부랴부랴 짐을 싸 인천으로 올라왔지만, 아버지의 마지막을 못 보고 보내드렸다.


한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호와 준섭 포함하여 총 5명. 여행을 계획했었다. 스무 살의 여름. 이 뜨겁고 찬란한 시기를 즐기기 위해 을왕리 해수욕장 근처 펜션을 예약했다. 여행 가기 며칠 전, 방학이었던 나는 늦은 아침에 눈을 뜨고 카톡을 확인했다. 부고 소식이었다. 친한 친구의 부모님 부고 소식을 처음 받아봤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대호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었고, 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소만 카톡으로 남겨줘. 내가 애들한테 연락할게."

"고맙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린 후 친구들과 장례식장으로 갔다. 덩치는 그리즐리 베어만 한 놈이 눈은 탱탱 부어있었다. 하지만 대호는 애써 웃으며 우리를 반겨줬다. 대호의 형과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장례식장에서 해야 할 행위들을 했다. 처음이라 어리둥절하는 우리는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시는 방법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린 대호 곁을 지켰고, 그날 기점으로 우리의 우정의 농도가 더 진해졌다. 힘든 일이 있거나, 좋은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알렸다. 특히 군대에서 사랑에 버림받을 때 같이 술을 마셔주었다.


준섭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기억도 잘 나질 않는다는 말이 왠지 더 슬프게 들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준섭이 처음으로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말을 했을 때의 모습이 나는 기억에 남는다. 1 분단 창가 쪽에서 무덤덤하게 말하는 어린 준섭의 모습이 선하다.


대호과 준섭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추억이 그리 오래 머물만한 것이 없었다.

대호가 군대 휴가 나왔을 때, 공교롭게도 추석이었다. 우리 집이 큰 집이었지만, 작은 집 식구 4명 우리 식구 5명만 모였었다. 나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께 대호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어른들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대호는 그 명절을 기점으로 매년 명절 때마다 우리 집에서 밥을 먹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준섭은 나와 아버지랑 다니는 조기 축구회에 나오면서 나의 아버지와 친해졌다. 같이 운동을 하면서 친해졌다. 이렇게 대호와 준섭은 아버님이라는 호칭으로 나의 아버지를 부르게 되었다.


"가끔 생각나냐?"

"생각 날 것도 없다" 준섭 특유의 투명스러운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아쳤다.

마음속에 동요가 일어났지만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이어 준섭은 처음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조금 길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 혼자서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을 본 준섭에게 삶은 다른 누군가의 삶보다 치열해야 했었다. 그리고 죽기 살기로 빠른 시간 내에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공무원이었다. 많은 보수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인 삶을 원했다. 준섭이 응시했던 시험 결과가 작년 합격 점수를 넘었었다. 합격했을 기대감에 젖어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보다 10점이나 차이나는 합격 점수가 결과로 나왔고, 준섭은 아쉽지만 떨어졌다. 충격이 컸던 준섭은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할지, 공무원 재도전에 대한 고민들을 이번 여행에서 풀기 위해 나온 준섭이었다. 원하는 답을 찾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호는 피곤했는지 롹커도 아니면서 눈을 감은채 헤드뱅잉을 하고 있었다. 준섭도 피곤하다고 했고, 우린 TV를 보며 마지막 잔을 비워냈다. 다음 날, 우린 된장 칼국수와 감자전으로 해장을 했다. 감자전이 기똥차게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나와 준섭은 강릉으로 가서 인천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고, 대호는 바로 거제도로 내려갔다.


다시 언제 올 줄 모르는 여행이 이렇게 마무리했다. 원하는 목표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이십 대 끝자락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 소중한 추억 한 줌이 생겼기에 그것으로 만족한다. 여행을 정리했다. 각자 인생의 페이지를 내일로 넘겼다.


1년 이 지난 지금. 나는 캐나다에서 살고 있고, 대호는 다니던 직장을 만족하며 다니고 있다. 준섭은 일반 기업 최종 면접을 앞두고 있다. 그 여행에서 고민했던 여러 가지 들이 조금씩 해결해나가는 것 같아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 기분이 좋다.


예전엔 공 하나만 있으면 행복했던 우리가,

이제는 공을 들여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은 서글프지만 언제나 늘 그랬던 것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고, 만났을 때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놀 것임을 우리는 알기에 그렇게 섭섭하지 않다.


우린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페달을 멈추지 않고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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