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이야기
2011년 11월, 유난히 추웠던 겨울날이었다. 동생이 친구로부터 강아지 한 마리를 받아왔다. 이름은 탁구. 작은 요크 셔테리어다. 영국 강아지로 1870년대에 요크 셔테리어로 이름이 정해졌다고 한다. 정원에 쥐를 쫒거나 쥐 사냥 본능을 지닌 종류이다. 빅토리아 시대 말 에는 영국 귀족 여성들의 랩독(Lap Dog)으로 유명했다. 말 그대로 무릎에 앉히는 작은 반려견으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던 나와 동생이었다. 동생과 나랑 엄마는 찬성했지만, 아버지와 할머니는 반대하셨다. 동생은 털이 잘 안 날리는 점을 강조하며 아빠와 할머니를 설득했다. 결국 설득에 성공한 동생은 친구에게 작은 요크 셔테리어를 받아왔다. 이름은 탁구였다. KBS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가 인기를 끌던 시절에 태어나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탁구, 흔하지 않은 이름이어서 정다웠다.
우리 집에 온 첫날, 탁구는 궁금한 것이 많았나 보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집구석 구석을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낯선 곳이라 긴장한 것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탐탁해하시지 않으셨다. 탁구는 나와 아버지를 특히 무서워했다. 이유를 알고 보니 동생 친구 오빠에게 학대를 당했다고 했다. 그래서 남자를 무서워하는 경향을 보였었다.
탐탁해하시지 않으시던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탁구를 찾으셨다. 술을 한 잔 하시고, 밤늦게 들어오면 항상 문으로 나와 반겨주었다. 술 한 잔에 기분이 좋으신 아버지는 탁구를 부르며 "이 집에서 너만 나를 반기는구나. 귀여운 녀석"하며 탁구에게 말을 걸어준다. 하지만 까탈스러운 탁구는 그런 모습을 보이면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니라 도망간다. 사람 손을 잘 타지 않는다.
나와 아버지는 탁구와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동생이 화장실에 가있으면 불안해했다. 내가 오라고 불러도 오질 않았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계속 산책도 같이 가고, 장난감으로 자주 놀아줬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마음을 열더니 잘 따르기 시작했다. 천둥이 크게 치던 날이 있었는데, 그 소리에 놀라자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 숨기 바빴다. 이제 우리를 믿기 시작했다.
영리한 종답게 여러 명령을 따랐다. '앉아'는 기본이고, 간식을 앞에 두고 '기다려'라고 말하면 '먹어'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먹질 않았다. 이후 하이파이브도 하고, '빵야'라고 말하면 배를 깔고 눕는 행동을 했다.
배변도 잘 가렸다. 화장실에다 해결했다. 하지만 자기 혼자 집에 두고 외식을 다녀오면 거실에 똥을 싸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영리한 녀석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만큼 탁구와 함께한 시간도 늘고, 추억도 많아졌다. 인간의 수명보다 짧은 탁구의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갔다. 잘만 올라오던 침대를 이제 못 올라오기 시작했다. 쉽게 점프해서 내려갔던 침대 위에서 머뭇거리는 탁구를 발견했다. 어느 날, 침대에서 내려오다 뒷다리를 삐끗했는지, 내려오자마자 깨갱깨갱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뒷다리 슬개골 탈구 수술을 해야 했다. 앞으로 수명이 4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수의사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다. 엄마는 속이 상하셨고, 돈과 상관없이 수술을 시키고 싶어 하셨다. 곁에 오래 두고 싶었다.
동물을 좋아하시던 엄마다. 엄마는 탁구를 보고 딱 자기가 키우고 싶었던 강아지의 모습이었다고 하셨다. 작고 귀여운 강아지. 엄마가 많이 힘든 시절, 탁구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남편과 자식이 해줄 수 없는 위로를 탁구가 해줬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 때문에 힘들었을 때도 탁구는 엄마를 위로해줬다. 어느 날 정말 힘들어 울고 있을 때, 탁구가 손을 핥아주었다고 했다. 원래 이러던 녀석이 아니라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 힘듦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탁구에게 고맙다.
항상 집에 가면 탁구가 있었다. 주로 이불을 안에 들어가 자고 있는데, 현관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뛰쳐나와 우리를 반겼다. 유럽 여행 한 달을 다녀오고 집으로 오던 날, 캐리어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원래 그러던 녀석이 아닌데, 내 몸 냄새를 맡고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겨줬다. 한 달만에 만나서 그런지 더 감동이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산책을 자주 시켜주지 않았고, 탁구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과 음식을 자주 주지 못했다. 항상 맛있는 것을 먹으면 옆에 앉아 가만히 나를 지켜본다. 이 음식을 주면 탁구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가끔 그 표정에 속에 몇 번 음식을 주긴 했었다.
11살에서 12살로 넘어가고 있는 탁구다. 요크 셔테리어의 평균 수명이 11~15년이라고 한다. 이별이 다가온다. 나도, 탁구도 나이를 먹고 있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탁구였지만 어느새 이십 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평균 수명의 끝자락으로 가고 있는 탁구.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 탁구를 볼 때 느껴진다.
탁구를 보면 항상 현재를 살고 있다. 항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던 나에게 그저 현실을 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산책이 있으면 산책을 즐기고, 간식이 있으면 간식을 즐기며, 장난감 놀이를 할 때면 그 누구보다도 그 놀이에 빠져 몰입하고 있다. 그저 현재를 살고,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라고 말하는 탁구인 것 같았다. 가끔 술을 마시면 '개'가 되긴 하지만, 현실에서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개'처럼 지금 이 순간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탁구는 항상 우리 가족을 보면 꼬리를 흔들고 좋아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흘러가는 세상,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받고, 사랑에 버림받아도 반려견은 항상 우리 옆에서 꼬리를 흔들어주고 있었다. 탁구를 보고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지금, 유일하게 불변하는 것이 있다면 반려견의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