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휘슬러의 삶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로 이어지는 비밀스러운 통로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점심에 먹었던 음식일 수도 있고, 버스에서 무심코 지나가게 된 어느 상가일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많은 곳을 걸어갈 때 훅 끼쳐온 어떤 향수일 수도 있다. 무심코 펼쳐 든 책의 한 구절일 수도 있고, 카페나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특정한 노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렇듯 기억의 통로들은 그렇게 곳곳에 숨어 있다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를 급습을 한다. 오늘은 <1인분의 여행> 책과 잔나비 노래가 나를 과거 혼자 했던 여행의 추억 속으로 안내했다.
내겐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라는 노래가 그렇다. 전주가 끝나고 첫 소절이 시작되는 가사 ‘그땐~’을 들으면 그 순간 밴쿠버를 혼자 여행하는 추억 속으로 잠기게 된다. 홀로 여행을 하는 것이 처음이었던 밴쿠버 여행은 주로 이어폰을 끼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때 즐겨 듣던 노래가 잔나비 노래였고, 특히 밴쿠버 그랜빌 아일랜드에선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이라는 노래를 많이 들었다. 특히 비가 많이 내리는 요즘 같은 시기에 급습하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랜빌 아일랜드는 밴쿠버 다운타운 남쪽의 그랜빌 다리 아래를 말한다. 아일랜드라고 부르긴 하지만 실제로는 폴스 크리크 튀어나온 반도다. 원래는 공장과 창고가 있던 낡고 오래된 공장지대였지만, 1970년대에 재개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다양한 숍과 레스토랑이 들어서 나들이객이나 관광객들로 붐비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그랜빌 아일랜드에는 유명한 곳이 2군데 있는데 퍼블릭 마켓과 특별한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양조장이 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고 옛 것을 흥미롭게 생각하는 나에겐 그랜빌 아일랜드는 특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양조장으로 갔다. 양조장은 1984년 그랜빌 아일랜드에서 시작한 맥주 회사다. 신선한 라거, 앰버 에일, 페일 에일 외에도 다양한 맥주들을 즐길 수 있다. 또 양조장에서 진행하는 투어도 있었다. 참여는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에 다시 가야지 하고 나왔다. 하지만 그다음은 없었다. 그것이 아직도 후회되는 것 중 하나다. 여행에서 다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려면 오직 지금,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여행에서 후회를 가장 덜 하는 방법이다. 이런 이유로 인생을 여행에 종종 비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랜빌 아일랜드 양조장에서 양조장 투어 말고 유명한 것은 샘플러(Sampler)다. 다양한 맥주 10잔이 샘플러로 나온다. 캐나다 양조장에서 마시는 생맥주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더 특별했다. 10잔 의 맥주를 천천히 음미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와 카톡을 하며 마시기도 하였고, 유튜브를 보면서 마시기도 하였다. 또 책을 읽으며 마시기도 했으며, 바람 없는 날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셨다. 그러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술기운이 조금 오른 상태에서 상기된 얼굴에 찬바람을 맞으니 더할 나위 좋았다.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노르스름한 맥주가 주는 그 느낌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순간에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고 외롭지 않았다. 그저 1인분이어서 좋았고, 흑백 세상으로 살던 나는 다시 색깔을 본 느낌이었다.
책에서 인용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구처럼, 한국에서 이미 충분하도록 많은 맥주를 마셨었고, 앞으로 서른이 되든 마흔이 되든 맥주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곳에서 만큼은 별개였고, 특별했으며 새로웠다. 앞으로 이런 맥주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혼자 여행을 했었기에 이런 특별함을 얻었다. 혼자여도 충분히 재밌었으며, 느끼는 것도 많았다. 더 심심해져야 한다는 작가의 말도 공감이 갔다. 심심해져야 더 무언가를 찾고, 많이 본다. 또 무언가를 하기도 하며,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기도 한다. 혼자이기에 다른 사람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앞으로 혼자 여행을 자주 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혼자라는 것은 외로워 보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외로움 것만 보면 안 된다.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는 선택들이 혼자만의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애틋한 마음이 들면 그것은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다.라고 말하는 이 책의 작가처럼 나에게 그랜빌 아일랜드 아니 어쩌면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는 나의 마음 한구석에 애틋함으로 자리 잡혀있다. 한국으로 귀국한 지 3개월 정도밖에 안 됐지만 너무나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행이었다. 애틋하다 못해 연민의 마음까지 드는 요즘, 정신없고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는 평범하고 비루한 하루에 따뜻한 위로를 받은 책이었다.
반복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경직된 여행자에게 광활한 캐나다 대륙 가운데를 떠올리게 만들고, 눈부시던 그 순간들이 새하얗게 바래지기 전에 이따금씩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주었으며, 비록 뜨거운 여름밤은 갔더라도, 결코 볼품없지만은 않았던
<1인분의 여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