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Knock! Knock! 12화

휘슬러 스키 그리고 보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휘슬러의 삶

by 림스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스키나 보드를 탄다. 시즌권 패스 가격 일부를 지원해주는 것이 포시즌 호텔의 복지였기 때문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한 번 타러 가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곧바로 스키 장비를 룸메 형한테 빌렸다. 시즌권을 사지 않았던 나는 일일 권을 샀었어야 했다. 시즌권을 소지한 사람을 통해 일일 권을 사면 50% 할인받은 금액으로 살 수 있다. 그래서 시즌권을 소지하고 있는 줄리에게 부탁을 했고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총 2번 산에 올라가 스키를 탔는데, 첫 번째는 보드를 꽤나 잘 타는 줄리랑 같이 산으로 올라갔다. 그 당시 줄리는 보드에 빠져있었고, 일주일에 거의 6일을 보드 타러 나갔다. 눈만 뜨면 산으로 향한 그런 분이셨다.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열정적인 보드꾼이었다.


곤돌라 안에서 이미 나는 휘슬러 산에 압도되었다. 산이 주는 에너지가 존재했고, 그저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웠다. 멀리서만 봤던 눈 쌓인 산들은 가까이서 보니 마치 나무들이 하얀 눈으로 옷을 갈아입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멍하게 보기만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내가 내려야 할 곳에 도착했었다. 부랴부랴 스키 장비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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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다. 날씨가 좋지는 않았지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보드를 타는 줄리는 꽤나 경사가 있는 곳을 망설임 없이 내려갔다. 역시 많이 타본 티가 났다.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림없지!’ 하고 내려갔지만, 망설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스키를 탄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적잖이 겁을 먹었었다. 넘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체에 힘을 많이 줬던 것으로 기억이 한다. 안 넘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공간이나 길은 예측이 안 되면 엄청 넓게 느껴진다. 휘슬러 산들이 그랬다. 휘슬러에는 크게 두 개의 산이 있는데 휘슬러 산과 블랙콤 산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두 개의 산들 각각 코스들이 다양했다. 조금 내려갔다가 싶으면 곤돌라 타는 곳이 나타났고, 그 곤돌라를 타고 올라와 어느 평지 코스를 가니깐 더 올라가는 곤돌라가 등장했다. 복잡했다. 물론 2번 밖에 안 가서 그럴 수 있지만, 자주 가는 사람들도 헷갈린다고 말한다. 그만큼 다양하다. 그렇게 가다가 얼음 동굴도 나오기도 하고, 나무들 사이로 스키를 타는 숲길도 나왔다. 가족들이 탈 수 있는 공간도 있었고, 초보자들을 위한 공간도 있었다. 하지만 휘슬러 스키장의 초보자 코스도 난이도가 꽤나 있었다. 그리고 고수들을 위한 다양한 구조물들을 설치해 놓았다.


일일 권이나 시즌권을 샀다고 모든 곳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도가 높은 7th Heaven이나 산과 산으로 넘어갈 수 있는 곤돌라, 하모니 같은 곳은 자연이 허락해줘야만 갈 수 있다. 허락해주지 않으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볼 수 없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자연경관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들었지만 자연께서 그러한 경관들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날은 꽤나 신경질적이었다.


아이스 케이브.jpg 스키장 안에 있는 동굴


휘슬러의 산들은 죽어가던 상상력을 자극했다. 언제부터 인간은 스키를 탔을까? 부터해서 이 산들에 새겨진 육십오만 년 동안의 기억들이 궁금했고, 이런 큰 곤돌라를 설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일을 했을까? 이렇게 높은 곳에 이렇게 큰 곤돌라를 어떻게 설치했을까? 어쩌면 인간 보다 더 높은 존재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라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유치한 생각들이었지만 이러한 생각을 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두 번째 스키를 타러 갔다. 이번에는 줄리와 도도랑 같이 산으로 향했다. 둘은 시즌권자였기 때문에 자주 탔었고 잘 탔다. 나는 그저 그 둘을 쫓아가기 바빴다. 다행히 날씨가 맑아, 낮 12시 정도가 되니깐 모든 곳을 갈 수 있었다. 이번엔 자연께서 허락해주신 것이다. 꽤나 들뜬 마음으로 스키를 탔다. 그러다 줄리는 일을 가야 하는 시간이 되어서 하산을 했고 도도와 둘이 곤돌라를 타고 블랙콤산에서 휘슬러산으로 이동했다. 이 날, 하루 종일 타면서 약 10만 원 하는 일일 권을 알차게 사용했다.


KakaoTalk_20200625_010348822.jpg 자연이 허락하신 하모니 산


자연께서 나에게 호의를 베푸셔서 많은 곳을 갔다. 산속에 있는 얼음 동굴도 갔었고, 7th Heaven, 하모니 또한 갔었다. 저분들을 보러 가는 길은 많이 험했다. 그래서 많이 넘어졌다. 온몸이 아팠지만 저분들이 만들어준 자연경관을 보니 고통이 사라졌다. ‘한 폭의 그림 같다.’라는 말이 얼마나 모순된 말인지 깨달았다. 자연은 예술을 모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관들을 최대한 담기 위해 자주 보았다. 가끔 정말로 아름다운 것들이 내 눈앞에 있으면 사진을 찍지 않고 그것을 그냥 본다. 몇 안 되는 날이지만 그 날이 그랬다. 이 날의 기억들은 바람 없는 밤의 눈처럼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가 잊을 수가 없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그 기억들은 이젠 추억이 되었다. 추억은 인생이 가진 의미를 끊임없이 상기시켜준다. ‘추억은 향기를 남긴다.’라는 어느 유명한 보드꾼의 말처럼 이 추억들은 풍기는 느낌만으로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힘들 때마다 꺼내 먹는 초콜릿 같은 이 추억들은 나에게 언제나 달콤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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